행복이라는 환상
나는 다양한 직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물리치료사다. 치료실에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분들에게 종종 건네는 인사말이 하나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최근 일주일 동안 기억에 남는 행복한 순간이 있으세요?”
10에 9는 없다고 답한다. 부끄러서 행복한 기억을 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정말 곰곰이 생각해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들은 분명 어제도, 오늘도 웃었다. 내 앞에서도 웃고 있다. 분명 그들은 일주일 동안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은 너무나 찰나여서 단 일주일 만에 아니, 하루 만에 기억에서 잊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행복하라고 말한다. 행복이 뭔데?,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데? 나는 행복하라는 말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도 쉽사리 나오지 않는데 그들은 얼마나 가볍게 행복을 운운할 수 있는 걸까.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 아무개 씨는 나에게 이 문제를 해결시켜 줄 수 있을까?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가치 있는 삶]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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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중략) 행복은 모든 행동의 동기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조차 그러하다.” _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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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삶]의 저자는 말한다. 현존하는 모든 정치, 종교 그리고 철학은 모두 길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다고 말이다. 이들에 세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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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 본질적인 질문 하나만 해보자.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 평생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네이버를 열어 어학사전에서 ‘행복’을 검색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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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幸福
_복된 좋은 운수
_충분한 만족과 기쁨, 흐뭇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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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감이 행복일까?
음식을 통한 포만감, 관심 있는 물건의 수집, 재화가 주는 안정감, 타인의 인정 등 우리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요소는 많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대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행복에는 내성이 있어서 더 큰, 더 자극적인 행복감이 아니면 이전과 같은 만족감을 얻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기쁨이 행복일까?
만족감과 굉장히 유사한 감정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만족감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 말고는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굳이 이 둘을 비교해 보자면 기쁨이란 행운과 같은 우연의 요소가 강하다는 점일 것이다. 때문에 이 기쁨이라는 녀석은 만족감과 달리 내성이 적기 때문에 행운과 마주할 때면 우리는 대부분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쁨이라는 감각은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찾아오는, 말 그대로 행운의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주제로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행복이라는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행복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살면서 추구해야 할 진정 의미 있는 것은 맞나?
독립운동 열사분들, 6-25 전쟁 호국영령들, 민주화 운동의 빛바랜 청춘들은 행복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의 울림과 존경심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반대로 행복만을 추구했던 이들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매국노, 이기심과 개인주의라며 비판하지 않았던가?
나의 예시가 굉장히 편파적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행복, 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행복도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진정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행복한 삶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울이라는 시작
행복이라는 감정에 환상에 이야기했다면 우울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감정만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혹시 '분노의 5단계'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임종 연구 분야의 개척자로 알려진 엘라자베스 퀴블러 로스_(Elisabeth Kubler-Ross, 1926-2004)가 1969년 출간한 죽음과 죽어감_(On Death and Dying)에서 등장한 말이다.
퀴블러에 따르면 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일 때는 대체로 5단계의 감정을 거친다고 하며, 단계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단계 : 부정 (Denial)
죽음을 처음 인지할 때는 대부분 상황을 후회하거나 부정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는 희망을 품는 것이기도 하다.
2단계 : 분노 (Anger)
부정과 무시, 후회로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하고 자신이 품은 희망이 꺾임으로 인해 극심한 분노로 이어지는 시기다. 어떤 이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의 형태가 분노로 표출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3, 4단계 : 우울 (Depression) & 타협 (Bargaining)
해당 단계는 혼재되어 발생한다. 우울함을 느낀다는 것은 상황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 종교와 적극적인 치료, 친구, 가족들과 적극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시기다.
5단계 : 수용 (Acceptance)
퀴블러에 따르면 수용한다는 것, 즉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감정을 겪고, 그 과정에 결국 지쳤을 때 나타나는 단계로 모든 감정을 차분히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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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는 것도, 각 감정 단계의 양상을 따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퀴블러의 주장은 굉장히 흥미롭다.
_우울함을 느낄 때 인간은 상황을 인정한다는 것.
_감정에 격통 속에서 지쳐 쓰러질 때 인간은 수용한 다는 것.
우울함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감정이다. 행복론자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울예찬론자인 나는 감히 말할 수 있고, 말하고 싶다.
허무주의, 패배주의에 빠져 우울한 인간들이 아니라, 용기를 세기고 노력했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도전했지만 결국 상실을 겪었을 당신에게 말이다.
당신의 우울함은 분명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쳤고, 내면의 내가 세상과 마주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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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번 돈은 쉽게 쓴다.'던가, '고통 없는 배움은 없고,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는 말처럼, 단지 삶의 여정 중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말이다. 작은 촌락에서 평생을 살며 여행자들을 비웃는 촌놈들에 말은 신경 쓰지 말아라. 가벼운 찰과상이라면 약을 바르고 길을 가면 될 것이고, 발목이 삐었다면 잠시 앉아서 휴식이 필요할 뿐이다.
우울함이란 여행 중 마주할 수많은 돌부리들이다. 그렇기에 우울함은 여행을 나서야만 만날 수 있다. 산을 넘고 강은 넘으면 점점 더 큰 돌부리를, 바위를 마주할 것이고, 당신의 우울함도 그 수많은 돌들과 같다.
우울한 삶을 살고 있는 염세주의자인 내가 사는 세상에는, 행복을 좇으라는 삶보단 우울함을 즐길 줄 아는 삶이 더욱 낭만적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사는 삶의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