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금방금방 자라고 해가 지나면 학년도 바뀌니까 올 해 아니면 입을 일이 없어요. 체험학습, 체육대회, 공개수업, 축제 뿐 아니라 일없이 모든 날에 입고 오면 더 좋습니다.
교사의 이야기
여러분이 직접 디자인하여 선정하고, 도안대로 오리고, 그 위에 스펀지에 염색물감을 묻혀 찍고 드라이로 말려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반 반티가 완성됐습니다. 이제 남은 건 뭐다?
(팔아요.)
(누가 사냐?)
이제 내 것을 정할 시간입니다.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 파는 옷들과는 다르게 여러분 각자의 손길을 거친 반티는 모두 조금씩 다릅니다. 노랑, 빨강의 경계가 선명한 것이 있고, 둘이 만나 번진 것도 있습니다. 색이 무늬를 넘어서기도, 그 안에 머물기도 합니다. 유화처럼 덧칠되고 뭉친 것, 수채화처럼 맑은 것도 있습니다. 가슴 위아래, 좌우 등 찍힌 위치도 다릅니다. 이거는, 아이고. 심지어 등 쪽에 찍혔어요.
(욱이가 했어요.)
(내 잘못 아니라고. 영진이가 저렇게 댔다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이거야말로 예술이지요? 예술에서의 창의성은 독창성입니다. 남과 다른 것, 구별되는 것이야말로 창의성이고 예술입니다. 분명히 이걸 선택하는 친구도 있을 걸?
여러분은 2학년 2반이면서 또한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지요? 모두가 2학년 2반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각자 다른 이름과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정성이 가득 담긴 이 옷들이 가진 특별함을 알아줄 주인을 찾아봅시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해도 여러분의 눈빛에서 어떤 경쟁심이 느껴집니다. 그렇지요. 누구나 내 눈에 가장 예쁜 반티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 옷들은 모두 다른 주인을 가져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가위 바위 보로 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뽑기도 아니에요. 모두가 자신의 선택으로 반티를 정할 겁니다. 물론 누군가는 양보와 배려라는 선택도 할 것이고, 뭔가 지금 후끈 달아오른 여러분의 눈치 싸움에서 선생님은 그런 선택이 간절함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물러서지는 마세요.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찾고 차지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양보하라는 거야, 마라는 거야)
(너, 반말)
어쨌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마다 성격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견디기 힘들어하고, 반면에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은 못 견디는 이도 있습니다. 너무 화려한 것을 갖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아주 밋밋한 것도 싫기 때문에 중간 정도의 적당함을 선택하기도 하고, 아예 흐트러진 것도 ‘뭐 어때 내가 만든 건데’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덕분에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이 각자 자기만의 옷을 찾을 거라고 믿습니다. 등 쪽에 찍힌 것부터 경매를 시작해 볼까요?
(저요!)
교사의 속내
동등하되 동일하지 않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여럿이 모여 구성하는 사회는 규칙과 효율성을 필요로 하고 이것은 구성원들에게 통일을 요구합니다. 학교 공동체는 작은 사회입니다. 모두를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져서 학생들이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고, 학교는 효율성을 우선으로 여러 문제를 결정합니다. 때문에 각자 저마다의 욕구와 필요, 사정이 있지만 학생들은 때로 불편한 통일된 규칙과 나의 이익과 어긋나기도 하는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대부분의 경우 똑같이 취급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친구들이 15줄 공책을 받으면 똑같은 것을 받아야 합니다. 친구가 화장실 가는 것을 허락받으면 방금 전 쉬는 시간에 다녀왔어도 또 가고 싶어 합니다. 더불어 교사들도 자꾸 통일합니다. 15줄 공책에 색깔까지 보라색, 빨간색으로 맞춰줍니다. 다름은 민원에 취약해서 행정의 정체성에 가까울수록 통일성이 주는 무난함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실 학생들은 똑같이 대우받기보다는 존중받고 싶은 겁니다. 공책을 나눠주다가 한 두 권이 부족할 때, 색깔이 여럿이어서 똑같이 나눠주지 못할 때 학생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학생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샘이 공책 2권이 부족한 걸. 어쩌나? 혹시 양보해 줄 사람?’ ‘혹시 갈색 공책도 괜찮은 사람?, ’역시 공책은 갈색이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 하면 먼저 양보하려고 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공책을 못 받거나 집단과 다른 것을 받아 존중받지 못한 느낌을 없애주면 되는 겁니다. 자신이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타인을 배려해 주는 존재가 되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거나 통일성에서 배제돼도 받아들이는 것이죠. 또한 어떤 것을 받는 사람이 아닌, 양보를 해 ‘주는’ 사람. 타인을 배려해 ‘주는’ 사람이 됐을 때 자존감이 높아지고 다름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학교는 학생을 존중해 주고 동시에 받기만 하는 객체를 넘어서 주는 주체로 상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동등하되 동일하지 않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의 원칙에 학교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가 같고 다른 것인가는 또 다른 논쟁의 영역이어서 교사들은 학교 차원의 이슈, 학급에서의 결정들에 오늘도 고민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