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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퍼먹는악어 Sep 27. 2023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 서론

복마전

우리는 분명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학생도 교사도 그렇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느는 것만 같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학교와 교사를 고소하겠다는 학생, 학생과 보호자를 두려워하는 교사, 학교에서 교사와 싸우다가 집에선 돌아앉는 보호자, 학생편도 교사편도 아닌 자기편인 관료들,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로 내심 자신도 교육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어른들과 말로 할퀴는 사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학교의 책임일까요? 학교가 책임져야 하는 것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엄마! 아빠가 수레에 날 태워주셨는데 운전을 잘 못해서 자꾸 부딪혀요. 아빠 정말 웃겨요.

-인생은 아름다워     


유태인이어서 아빠와 강제 수용소에 갇힌 아이는 아빠의 하얀 거짓말 덕분에 수용소 생활이 게임이라고 생각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안정되고 즐거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수용소 노동에 쓰이는 수레를 아이에게 태워줍니다. 그런 아빠가 못 미더웠는지 아이가 엄마에게 흉을 보는 겁니다.     


지금 우리 학교라면요. 학생은 수레에 타는 것이 영 시시했는데 그나마도 운전을 잘 못하는 허접한 선생님 때문에 다쳤다고 엄마에게 이르고, 사실을 확인한 엄마는 관리자에게 항의하고 고소를 진행합니다. 교육청은 수레는 어디서 난 것인지 의아해하며 학교에서 수레를 끄는 것이 합당한 지의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고, 교사가 생각기에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는지 물은 후, 어쨌든 학생과 학부모가 상처받았다고 느껴 흥분된 상태이니 사과하여 저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것이 성실의 의무에 맞다고 공손한 어투로 공손한 어휘를 심드렁하게 내뱉습니다. 교사는 수레를 닦으며 이곳은 학교가 아니라 실은 수용소였다며 학생을 교육하고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왔는지 아이와의 역사를 되내며 생존 투쟁에 나섭니다. 경찰은 실체가 없어서 보이지도 않는 울타리의 역사 따위에는 당연히 관심이 없고, 수레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동시에 반 학생들에게 담임이라고 불리는 저 자의 운전 행위를 객관적으로 서술해 달라고 목격자 진술을 요청하여, 교사가 수레를 끌며 교통법규를 지켰는지를 면밀히 조사합니다. 판사는 수레에 태운 자는 고등교육을 받은 어른이면서 책임져야 하는 교사이고 수레를 탄 자는 나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학생이라고 규정한 후 약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땅, 땅, 땅.     



실수할 수 있는 특권.

학생은 실수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등교합니다. 학교는 배움을 위한 공간이고 배움의 많은 부분은 시행착오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많은 경우 실수, 실패, 잘못을 통해서 배우고 성장합니다. 학교와 교사는 학생을 잘 품어 줄 울타리가 돼야 합니다. 울타리는 학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 교사의 스타일, 학생의 기질, 둘의 관계 등을 고려한 교사의 판단에 따라 넉넉하거나 좁거나 강력하거나 느슨하거나 낮거나 높을 수 있겠습니다. 

학생의 특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학교와 교사의 교육적 권한과 선택이 폭넓게 인정받는 세계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의 손을 잡고 울어줄 수도, 산처럼 막아서고 번쩍 들어 올릴 수도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학생에게 빙긋 웃어서 부끄러움을 더하거나 덜 수도, 취조하듯 엄하게 몰아붙여서 먼저 인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합니다. 막아서거나 들어 올리거나 방긋 웃거나 몰아붙이거나 모두가 교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입니다. 신체적, 정서적으로 무리한 일이 아닌 지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사가 직관과 경험에서 나오는 지도 행위들의 맥락과 교육적 의미들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것은 지난하고, 더구나 교사인 '나'의 '무죄 증명'을 위해 동료들, 유관기관 종사자들(상담, 아동보호 관련 기관 등)과 학생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면 모욕적이며 수치스럽습니다.   

   

특권의 박탈

아쉽지만 세상은 '실수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학생,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교사의 재량권 보장'의 콘셉트와는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화를 지지하는 여론, 학폭위 등에서 교사의 판단에 의한 교육적 지도보다는 불편부당하고 엄격한 결론을 요구하는 관련 당사자들, 학생과 보호자에게 당하는 고소에 맞서 교보위(교권보호위원회)를 현실화하자고 주장하는 교사 등. 이제 세상은 첫째, 학생에게 "너희들의 실수는 더이상 세상이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과하므로 성장이라는 책임 이전에 사회와 공동체에 정학, 손해배상, 소년원 등 실질적 벌이나 대가를 통해 책임을 지라"라고 요구합니다. 둘째, 교사에게 "여보세요, 세상은 선생님이 말하는 학교의 특수성에 관심이 없고 따라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당신의 재량권도 축소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법앞에 떳떳하게 행동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교사가 일종의 사회 대표로 꾸짖고 벌주고 반성과 성장을 요구하던 세상이 더 이상 아닙니다. 따라서 실수를 통한 성장이라는 학생의 특권을 지켜주기 위해 필요했던 교사의 권한도 당연히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에게 하는 농담조의 핀잔도 학생이 저지른 실수나 교육적 상황, 의도와는 별개로 모욕 행위로 비난받을 여지가 높아졌습니다. 또, 설사 사고를 막기 위해 학생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법으로 규정된다 하더라도 그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 법의 논리와 잣대로 엄격하고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엄격해졌습니다.      


교실 속 스토리텔링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도 등교하고 출근해야 합니다. 서로 운신의 폭이 좁아졌으나 여전히 학교는 배움과 삶의 장입니다. 앞으로도 학생들은 학교와 교사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성장해야 하고 울타리를 관리하고 장악할 책임은 교사에게 있습니다. 그 장악 수단의 하나로 교사의 교실 속 스토리텔링을 제안합니다. 스토리텔링에 담긴 교육관을 나누는 논의와 논쟁을 통해 교사와 보호자 모두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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