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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쓴 남자

by 해리슨 리 Feb 24. 2025

난 지하철 출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땐 마치 하늘에 펑크가 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모습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몰려왔다.


구렁이도 삶아버릴 것 같은 불볕더위가 지하철 출입구 담장을 넘어 스멀스멀 지하로 엄습해 왔다. 한시라도 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넷플릭스나 시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인제 와 약속을 파투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땡볕을 걸으며 땀으로 샤워하기는 싫고, 30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택시로 갈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낭패감이 들었다.


“어떡하지. 이러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방법은 딱 하나. 손에 쥔 우산을 펴기로 했다. 일단 마음을 굳게 먹고. 계단을 올라가며 우산 손잡이의 버튼을 꾹 눌렀다.


파악-.


내 정수리 위로 파스텔 색조의 보호막이 펼쳐졌다. 고즈넉한 그늘막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대로변 흡연구역에서 빡빡 담배를 태우는 직장인들이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겠지, 아마 한 여름에 양산을 쓴 남자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이거 양산이 아니라 우산이거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걸을 때였다. 가로수 아래 피어난 잡초가 내가 말을 걸어왔다.


“해리슨, 지금 너의 손에 들린 우산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윤슬에서의 첫 경험 이후 잡초와의 대화가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발걸음을 이어가며 내가 대답했다. “음, 우산은 본래 비를 피하는 용도이지. 그렇기에 비가 그치면 무용지물이 돼. 하지만 오늘 같은 상황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약속을 가는 길에 땀으로 범벅이 되지 않게 막아주니까 그리고 폭우보다 더 사나운 폭염을 차단해 주니까.”


“와우, 좋았어. 그럼, 지금 이 상황을 주식시장과 연결 지어 본다면?”


이번엔 왠지 잡초가 주식 투자에 있어 가격과 가치에 대한 수수께끼를 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구전동화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 어머니>를 떠올렸다.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려 좋고 해가 뜨면 짚신이 잘 팔려 좋은 어머니의 심정을 응용하여 주식시장에 대입해 보았다.


“우선 말이야. 네가 여름휴가를 떠났다고 가정해 보자. 휴가지에 도착해서야 작년에 사둔 물놀이용 고무 튜브를 깜빡한 걸 알게 됐어.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판매하는 튜브를 40달러에 사기로 했지. 그런데 네가 루프탑 수영장으로 올라가려던 찰나에 수영장 수심이 1미터도 안 되는 걸 발견했다면 과연 튜브의 구매 필요성을 느낄까? 허리춤까지 밖에 차오르지 않는 수영장의 물 높이에선 틀림없이 튜브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울 거야.”


“그래서? 계속 말해봐.”


“하지만 수심이 30미터가 넘는 바다 한가운데서라면 다를 거야. 만약 네가 탄 비행기가 망망대해에 불시착했고, 승객들이 구명조끼도 없이 탈출한 상황이라면? 비행기 본체가 침몰하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고무 튜브를 판매하고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혼돈 그 자체이겠지. 모두가 고무 튜브를 차지하기 위해 실제 가격보다 더 높이, 아주 더 높이 지불하려 들 테니까 말이야.”


“음, 아주 흥미로운 발상이야. 튜브의 본질, 즉 튜브의 가치는 변하지 않지만, 극과 극의 상황에서 인간의 심리가 개입했을 때 양극으로 치닫는 가격의 움직임에는 일리가 있어.”


잡초가 재미있게 들어주어 난 신이 났다. 그래서 계속 이어갔다. “두 상황별로 주식 차트에서 움직임을 표현해 보면 어떨까. 한가로운 호텔 수영장에서 판매하는 튜브의 가격 움직임은 아주 조용하고 평평한 흐름일 꺼야. 꼭 아무도 없는 욕조에 홀로 떠 있는 오리 인형처럼 말이지.”


“그래, 그래.”


“하지만 그와 반대로 비행기가 추락한 상황에서 판매하는 튜브의 가격 움직임은 흡사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용이 구름 위로 승천하는 모습 아닐까, 생각해. 아주 뜨겁고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줄 테니. 오늘의 대화를 정리하자면 바로 ‘주식 투자를 할 땐 가격의 파도가 잔잔할 때 진입해서 높게 솟구치면 빠져나오는 것’으로 아주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는 이 말씀.”


“오호호, 해리슨. 그동안 좀 늘었는데?”


잡초가 손뼉을 치며 칭찬해 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발걸음에 힘을 보탰다. 문득 주위를 살피자 어느덧 건널목에 도달해 있었다.


보행신호를 기다리는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내 머리 위 우산에 쏠림을 감지했다. 놀라움과 부러움이 교차하는 것을 만끽했다.


그 와중에 내 옆에 서 있던 한 어르신이 슬그머니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셨다. 손바닥만 한 손수건으로 연신 짜증이 가득한 이마를 닦으셨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배시시, 하고 웃으셨다. 난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그래서 내 몸의 중심에 위치했던 팔을 어르신 쪽으로 약간 보탰다. 나는 배려심 1도 없는 꼰대가 아니니까, 약속 장소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진 그늘을 조금 나누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치 투자의 대가 하워드 막스는 그의 저서 <투자에 대한 생각>에 썼다.


“가치투자자에게 투자의 시작은 가격이어야 한다. 너무 비싸게 매입하고도 나쁜 투자는 아닐 만큼 좋은 자산은 없으며, 충분히 싸게 매입하고도 좋은 투자가 아닐 만큼 나쁜 자산은 없다.”


내 머리 위에 꽂힌 시선의 정체가 대중의 욕심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식시장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가격이 상승하는 것만 쫓는구나. 난 그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역발상 투자자인 셈이고. “싸게 사서 비싸게 팔라.” 주식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격언을 이제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 잡초와의 대화를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진하고 여운이 깊은 주식 투자 교훈을 남겨주었다. 우산 덕분에 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길을 건너면 곧 가을이 찾아오겠구나, 생각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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