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가 초록빛으로 물들었던 날.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집 근처에 가정식 덮밥을 판매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배달 주문을 받질 않아 직접 포장을 해와야 했다. 아파트 정문에서 우회전 그리고 쭉 직진해서 건널목만 건너면 되었다.
불고기덮밥을 먹을지 아니면 닭갈비 덮밥을 먹을지. 고민과 함께 보행신호를 기다릴 때였다. 길 건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복작거리고 있었다. 누가 쓰러졌나? 문득 들여다보고 싶었다.
삐리릭- 삐리릭-.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졌다. 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둥글게 모인 사람들 속에 어떤 할머니가 쭈그려 앉아 복숭아를 팔고 계셨다. 등 뒤로는 복숭아 상자가 겹겹이 쌓아져 있었다. 3개 만원, 골판지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오늘 농장에서 올라왔어요.” 할머니가 이마를 젖히고 손님과 대화하고 있었다. 힐머니가 하얀 비닐봉지 안에 복숭아를 주섬주섬 담을 때였다.
봉지 속에 미처 담기지 못한 복숭아 한 개가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는 복숭아를 보며 할머니가 어 어, 하셨다. 움직임을 멈춘 복숭아를 내가 집어 올렸다. 거친 아스팔트에 상처나 군데군데 으깨져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과거의 나’ 같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올라왔다. 건널목에 우뚝 선 채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밀검사 결과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 찾은 대학병원에서조차 같은 대답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연로한 교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증상을 믿질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절대로 위가 멈출 수는 없다고 모니터 속 차트를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밥을 최대한 천천히 씹어 먹으라,며 소화제를 60일간 처방해 주었을 땐 정말이지 “이 돌팔이 같은 새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늙은 의사의 멱살을 부여잡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두 눈을 부릅뜰 힘조차 없었으니,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알약이 자갈 같아요.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어요……”
“어휴, 진짜-.”
교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간호사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작은 볼멘소리가 나에겐 협박처럼 들려왔다. 간호사는 어떻게 해 서든지 나를 쫓아내려는 눈치였다.
내 앞에 앉은 의사도 거들었다. “음, 단순 체한 것이거나 거식증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이럴 땐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면 도움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다음 말을 난 차갑게 무시했다. 그간 다녀간 모든 병원에서 지겹도록 들었다. 현대 의학에서 위가 멈추는 일은 없다고. 몸은 먹고 싶다는 의지 없이도 먹는다고. 그게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내가 몸을 일으키자, 간호사는 다음 순서의 환자 이름을 부르며 내 등을 진료실 밖으로 가볍게 떠밀었다. 떼거지처럼 몰려든 환자들을 교통정리 해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나의 존재는 그저 병원으로 몰래 잠입한 잡상인에 불과했을까, 무력감과 모욕감이 절묘하게 합쳐진 순간이었다. 나는 간호사의 차가운 눈총과 함께 쓸쓸히 퇴장했다.
최신식의 검사장비도 측정하지 못하는 내 증상보다 정작 나를 미치게 했던 건,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증상을 들은 사람은 정작 “아이고, 정말 고통스러우시겠어요.” 동정의 말을 건네면서도 눈은 즐거워 보였다. 마치 뒷방아 찍을 수 있는 가십거리가 생겼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타인의 상처를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자를 마주할 때면 난 개복해서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시멘트를 뱃속에 한가득 부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은 끔찍함이나 처절함 또는 비참함 따위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목젖 아래부터 배꼽 위까지 아무런 감각이 없는데, 그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스가 부글거리는데, 하루 종일 경련인지 발악인지 알 수 없는 춤을 미친 듯이 추어 대는데. 어떻게 이런 내가 정상이란 말인가. 곧 화성에서 신인류를 개척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시대에 인간의 병 하나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약국은 의외로 찾기 쉬웠다. 대학병원 정문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었다. 접수창구에 처방전을 내밀고 비용을 지불하자 곧 의약품이 조제되었다. 약봉지 위로 투명한 비닐로 밀봉된 알약들이 기다랗게 삐져나와 있었다. 약국 밖으로 나오자 눈이 부셨다. 아니, 누렇게 보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횡단보도 쪽으로 몇 걸음 내딛자, 소실점이 한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다. 나는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직행했다. 두 팔을 뻗어 가까스로 몸을 지지했지만, 약봉지엔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횡단보도 위에 나동그라진 약봉지는 늘어날 대로 늘어나 더 이상 재생이 불가능한 카세트테이프 같았다. 어차피 삼킬 수도 없는 소화제 따위 필요도 없었지만.
“이건 저주가 분명해…… 하늘이 내리는 저주.”
길바닥에 쓰러진 내가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보도블록 사이에 핀 잡초 위로 두꺼운 눈물만 투둑투둑, 떨어졌다.
잠깐 멍하니 복숭아를 손에 쥔 채 생각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4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횡단보도 앞에 주저앉아 울던 과거의 나에게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아픔은 지나간다, 반드시.” 이런 뻔한 말로 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 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희망 운운하지 않기로 그날 다짐했다.
몸의 반쪽이 여전히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할머니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인파에 묻혀 잘 보이질 않았던 어떤 글자의 형상이 내 눈에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졌던 복숭아를 할머니께 건네며 내가 말했다.
“할머니. 복숭아 한 박스 주세요.”
일순, 모여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됐다. 오늘 나는 덮밥을 포장해 오는 대신 복숭아 한 박스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늘이 내린 복숭아.
박스 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