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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의 소원

by 해리슨 리 Feb 03. 2025

후더운 여름날. 세상의 모든 고민을 홀로 짊어진 표정으로 나는 걷고 있었다.


회현역에서 발길 닿는 대로 향하다 보니 내 앞에 낡은 고가차도를 개조하여 만든 보행로가 나타났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던 도로 위에 나무들을 심어놓고 사람들이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난 그 길을 쭉 따라갔다.


절대로 씻겨 내려가지 않을 것 같은 마음속 걱정으로 인해 발걸음은 터벅터벅 무겁기만 했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기찻길의 풍경이 옆으로 뭉개졌다. 보행로가 끝나는 지점에 무언가 반짝이는 원형 물체가 눈에 띄었다.


“뭐지, 조형물인가?”


궁금증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흡사 거대한 동전처럼 보이는 존재의 정체는 문화 예술공간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었다. 입구 앞에 배치된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순우리말이었다. ‘참 예쁜 말이네, 윤슬.’ 그 뜻을 곱씹으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렸다.


윤슬은 땅을 판 후 그 위에 스테인리스 강판을 지붕으로 덮은 형태였다. 수백 개의 돌계단이 촘촘히 쌓아 올려진 지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는데, 마치 움푹 파인 국그릇(Bowl) 같았다. 내 키의 두 배 높이 위에 얹힌 육중한 스틸 프레임 지붕이 강렬한 빛을 뿌렸다. 물결 같은 그림자가 돌바닥 위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윤슬은 푹푹 쪘다. 얼마나 더웠냐면 내부 공기가 물처럼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흡사 내가 서 있는 공간의 정체가 커다란 연못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잉어겠네. 연못 속에 담긴 잉어.”


혼자 피식 웃었다. 갑자기 내 발밑을 졸졸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물고기 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의 근심은 며칠 전 눈부신 시세차익으로 주목받은 반포의 로또 아파트 청약에서 떨어진 실망감이었다. ‘강남 아파트를 사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된 지 오래었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내 욕망은 꾹꾹 누른다고 감출 수가 없었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 부양가족이 없어 청약 점수가 미달하니 추첨에서 계속 탈락하였다. 지붕을 뚫고 신고가를 써버리는 강남 집값을 그저 망연자실 바라보며 제비뽑기에 당첨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나의 인생이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찰나에 돌계단 사이에 핀 잡초가 난데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해리슨. 만약 네가 강남에 집을 사면 행복할 거로 생각해?”


환청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내게 잡초가 이어 말했다.


“돈에 일상을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부의 상징인 강남 아파트를 원한다 해도, 넌 일상이 돈에 휘둘리지 않는 경제적 자유를 이미 이루었잖아. 넌 닭장에서 풀려난 독수리란 말이야. 그런데 다시 닭장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 이 멍청아!”


한여름의 무더위를 먹은 건지 아니면 합격선을 넘어서지 못하는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잡초의 환청을 듣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스테인리스 강판에 반사된 햇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물결 같은 빛의 움직임에 눈이 부셨다. 일순,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수면위에 비친 윤슬을 내려보지만, 물고기들은 물속에서 올려다본다. 문제의 앞면과 뒷면이 공존하는 상황이라면, 보는 시각에 따라 관점이 전환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 그동안 나를 구속해 왔던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은 이야기했다. “넌 네 직업이 아니야. 넌 은행 계좌에 든 돈이 아니야. 넌 네가 운전하는 차가 아니야. 넌 지갑 속에 담긴 신용카드가 아니야. 결국 네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게 결국 널 소유하게 될 거야.”


아잔 브라흐마는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 썼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다. 설령 1억 달러를 가졌다 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그것은 당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이다. 그때만이 당신은 완벽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동안 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꼴이었다, 어차피 죽을 때 무덤 속에 담아 가지도 못하는 강남 아파트에 전전긍긍하면서. 감옥이란 지금 속한 자리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환상일 뿐, 진정 자유로운 세상은 지금 여기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해리슨, 잉어들은 물속에서 어떤 소원을 빌까?” 내가 아무런 대꾸를 못 하자 잡초가 홀로 이어갔다.


“과연 잉어들이 지금보다 더 넓은 연못으로 가기 위해 헤엄치는 건지 한번 생각해 봐. 잉어들에겐 연못이 가진 교통, 학군, 상권 따윈 중요치 않아. 그저 영양이 가득한 규칙적인 식사와 연못 구석구석을 헤엄칠 자유를 바랄 뿐이야.”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난 오늘 잡초에게 한 수 배웠다. 잉어들은 아가미가 있어 물속에서 마음껏 헤엄이라도 칠 수 있지, 공기 없이 단 5분도 숨을 못 쉬는 주제에 돗자리만 한 아파트 강남에 한 번 얻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난 깊이 반성했다. 연못은 겉에서 보기에 물과 빛의 움직임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그 아래에는 더 많은 물고기와 식물 그리고 곤충들이 살고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반짝이는 허상 따위보다 내 속에 더 많은 것을 가꾸어야 한다고 뉘우친 하루였다.


“욕망하는 것을 포기할 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면, 앞으로 난 평생 잉어처럼 살리라. 그저 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으며 연못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잉어!”


속으로 다짐하며 연못 위로 걸어 올라왔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날씨는 여전히 무거웠다. 습식 사우나를 다녀온 듯 몸이 푹 삶아진 것 같았다. 물고기들은 물속에서 얼마나 더울까, 지구 온난화가 이렇게 심각한데.


문득 횟집 앞에 전시된 수조 속에 얼음을 듬뿍 담아 주고 싶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물고기들 시원해지라고. 그리고 난 집에 가서 냉수로 샤워해야지, 정신 좀 바짝 차리라고.


저녁은 시원한 회덮밥이 좋겠다, 입맛을 다셨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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