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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시장 갈치조림

by 해리슨 리 Jan 27. 2025

회현역 주변엔 재미난 곳들이 참 많았다. 조선시대 저잣거리로 시작한 남대문 시장의 영향인지 몰라도 매력적인 상점과 카페 그리고 음식점이 즐비해 있었다. 더욱이 이 동네는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터라 오래된 건물들 사이사이에 숨겨진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많았다. 마치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내 눈엔 낭만적으로 보였다.


“맛집들을 단 한 곳도 빠짐없이 모조리 방문해 줄 테야.”


욕심쟁이 심보가 두더지처럼 불쑥 튀어 올랐다. 나도 참 주책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신기한 건 한번 코워킹 공간에 올라오면 내려가기가 싫었다. 너무 의욕이 앞섰던 것인지 아니면 내 자리가 너무 편한 것인지, 그냥 계단 등산은 하루 한 번이면 충분했다.


내 책상에서 보이는 남대문 시장의 활기찬 모습은 흡사 연극 무대 같았다. 무엇인가 가득 리어카에 싣고 가는 아저씨부터 관광지도를 구겨 쥐며 호떡이 맛있다고 비명을 지르는 외국인 관광객 그리고 싱그러운 젊음을 예쁘게 치장한 대학생들까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엔 꽤 낯선 풍경이지.”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왠지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구경거리가 즐비하고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저녁 식사 시간에 가까웠다. 나는 회색 노트북을 가방에 잘 챙겨 넣고 가파른 건물 계단의 능선을 따라 살금살금 내려왔다.


남대문 시장은 초입부터 시끌벅적했다. 시장 큰 골목 마디엔 얇은 칼국수 샛길이 있었는데 각 칼국수 집마다 좌판 앞에 의자 몇 개를 깔아두고 장사를 했다. 면을 삶는 수증기가 어찌나 강하던지, 들어가자마자 내 안경에 김이 확 서렸다. 인심 좋아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어서 앉으라 연신 손짓했다. 뿌옇게 흐려진 안경을 닦다 엉겁결에 앉을 뻔했으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오겠다 약속했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큰 골목으로 나왔다. 좀 더 들어가니 갈치조림 간판들이 어지럽게 걸려있는 다른 샛길이 보였다. 칼국수 골목과는 반대로 여긴 골목에서 조리하고 내부에서 식사하는 시스템이었다. 골목은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뚫고 가려는 사람들로 아주 바글바글했다. 퇴근길 만원버스 같았다. 인파 사이를 요리조리 뚫어낸 매콤한 청양고추 냄새가 내 코를 쿡, 찔렀다.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하다 난 사람이 별로 없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싶었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으니 식당 이모님이 혼자냐, 물으셨다. “네.” 대답하기 무섭게 밑반찬들이 날아왔다. 팽이를 치는 손목 스냅으로 반찬들을 가볍게 테이블 위로 착지시키는 이모님의 솜씨가 실력 좋은 카지노 딜러의 카드 분배 기술처럼 노련했다.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벽에 적힌 시시콜콜한 낙서를 무심하게 훑어 내려가는 나에게 이모님이 다가왔다. 손에는 검은색 뚝배기에 담겨 보글보글 거리는 갈치조림이 있었다. 또 던지면 어쩌나, 덜컥 겁에 질렸다. 하지만 이번엔 두 손으로 살포시 올려 주셨다. 속으로 “휴, 참 다행이다” 여기며 새빨간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후후, 불어 입에 넣으니 얼큰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혀 전체를 타고 번졌다.


아…… 바로 그 맛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갈치조림!


따뜻한 국물의 온기가 나의 목구멍을 타고 빈속에 스며들었다. 마치 배가 아플 때마다 천천히 둥글게 어루만져주던 할머니의 약손 같았다. 온몸이 찌르르, 하고 울리는 것을 느끼며 살이 도톰하게 오른 갈치 토막을 젓가락으로 집을 때였다. 불현듯 내 어린시절의 기억 한 토막이 바다 속 부표처럼 불쑥 솟구쳤다.


한 10살 때였나, 그때부터 난 갈치를 좋아했다. 하루는 동네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식탁 위에 살이 넓적하고 퉁퉁하게 오른 갈치구이가 올라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비릿하면서도 짭짤한 냄새가 내 코를 좌우로 벌렁거리게 만들었다. 하얀 살점은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륵 녹았다. 참말이지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옆에서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투정했다. “아이 착하지, 딱 한입만 더 먹자.” 친구의 엄마는 다정하게 갈치 살을 발라주며 그의 응석을 모두 받아 주었다. 그녀는 젊고, 예쁘고, 자상했다. 사실 난 그게 너무 부러웠다.


“아, 싫어. 난 갈치가 먹고 싶다고!”


구운 생선의 고소함이 나를 탐욕스럽게 만들었나.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머니에게 갈치를 먹고 싶다고 투정 부렸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계속 안 된다, 시끄럽다 혼내셨다. 매일매일 할머니와 나의 신경전이 줄다리기처럼 이어졌다. 나는 절대 지지 않았다. 아니, 질 수 없었다. 어느덧 나의 투정은 투쟁이 되었고 결국엔 백기를 든 할머니가 시장에서 갈치를 사 오셨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 까만 봉지 안에 담긴 비린 냄새를.


할머니가 해 주신 음식은 갈치조림이었다. 어린 나에겐 매웠지만 맛있었다. 나는 마치 연어를 사냥한 곰처럼 갈치를 먹어 치웠다. 얼얼해진 혀를 물로 진정시킬 때였다. 할머니가 이상했다. 갈치를 전혀 드시 질 않았다. 여쭤보면 그냥 됐다, 하시며 갈치 뼈에 붙은 앙상한 살점과 징그럽게 생긴 내장만 챙겨 가셨다. 그리곤 물감 같은 빨간 국물에 밥만 가득 비벼 드셨다. 그땐 몰랐다, 왜 나에게 살만 주셨는지를. 그 갈치가 할머니와 나의 일주일 식대였다는 걸 어린 나는 몰랐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매운 고춧가루 탓인가. 갑자기 울컥 목이 메었다. 소주 없이는 부드러운 갈치살도 넘어가질 않았다.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할머니. 하늘에서 가끔 내 생각을 하실까. 할머니 생각이 나면 또 여길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니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던 골목이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꼭 지금 내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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