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탓이 아니었다 12

햇볕 탓이 아니었다 12

by 불량품들의 사계

햇볕 탓이 아니었다



나는 상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맨날 들여다본다고 자란다요?”

술 취한 쇠 긁는 목소리에 연자방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풀치였다. 일찍도 출근했다. 그는 잠바도 안 걸치고 마당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앉아있었다.

나는 대꾸도 안 하고 평상에 앉았다.

풀치 행동에 만성이 된 듯 성길씨는 텃밭에서 비닐을 들추며 웃고 있었다. 나는 성길씨 밭으로 갔다. 성길씨네 상추는 아이 손가락 마디만큼 자랐다.


“아따 상추 겁나게 컸네. 사장님, 대단허시네. 축하해요!”

“뭐가요? 자랄 때 되니까 자란 거지.”

성길씨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 밭은 다들 코딱지만 허게 저렇게 있는디...”

나는 성질이 급해 모기 혀만큼 올라온 싹을 보고 촉새처럼 비닐을 홀라당 걷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인내심 있는 성길씨가 부러웠다. 나의 자책에 그가 기분 좋아 보였다.

“농사가 쉬운 줄 아세요? 인생이에요.”

그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했다.

“그 인생 미리 내게 갈케 주지 좀 그랬어요?”

성길씨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뭔 소리여?’ 표정을 짓고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추이파리에 인생을 곁들여 말하는 그가 달리 보였다


성길씨가 밭 양쪽 가장자리에 벽돌을 놓고 산에서 베어 온 생강나무 가지를 벽돌 위에 올려놓았다. 비닐이 새싹에 닿지 않게 벽돌로 공간을 만들어 덮은 것이다. 거기에 양쪽 끝을 흙으로 덮으니 비닐 안으로 바람 한 점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도 다시 밭에 비닐을 치고 돌과 막대기와 빨래건조대까지 총동원하여 눌러놓았다. 그런데도 내 밭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비닐이 들썩거렸다. 하! 비닐 안에 매달린 물방울이 또르르 주르르 비닐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여?”

좌우지간 같은 날 씨앗을 뿌렸는데... 성길씨 밭은 저런데 내 밭은 왜 이런 것이여...

내가 투덜거리자 연자방아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던 풀치가 말했다.

“성길 형 밭은 저녁때까지 햇빛이 들고 저기 저 누님 밭은 막사가 죙일 해를 가리니 싹이 늦을 수밖에”

맨날 술만 처먹고 헛소리하던 풀치의 말이 내 귀에 착 감겨왔다.

“ 근디 내가 왜 그쪽 누님이여?”

풀치는 저 말만 하고 누워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트롯을 따라 불렀다.

평소 같으면 술주정뱅이 말은 귓구멍으로도 안 들었을 텐데, 왠지 그의 쉰 소리에 위로가 되었다.

오늘은 어째 남자들이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꼭 햇빛만은 아닌 것 같다. 성격 급한 내 문제도 있는 것 같았다. 비닐을 입혔다가 벗겨냈다가 다시 입혔다가 생쇼를 했으니.


바지런하다고 장땡은 아니다. 몇십 년 농사 노하우가 있는 성길씨를 못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 경험과 세월을 잔머리로 따라갈 수 있을까.

햇빛도 햇빛이지만 경험 부족으로 내 밭엔 새싹이 잘 자라지 않고 있다.


내게 필요한 건 부지런함보다 가만히 너를 기다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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