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세 번째 입원을 하게 된 때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요한 시험을 앞둔 때였다.그리고 그 해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엄마의 친동생, 그러니까 나에겐 작은 외삼촌이 죽었다. 하... 나의 작은 외삼촌... 이것도 이야기가 길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우리 외삼촌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어울릴 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사람. 단 한 번도 여자와 사귀어 본 적 없는 사람.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받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 누나와 형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못 펴본 가여운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삼촌은 젊었을 때 작은 인형을 만드는 일을 했었다. 회사에서 근무했는데 아주 작은 인형을 정교하게 붙이고 다듬는 일을 했다. 삼촌이 만든 것을 보여주면 신기했다. 인형의 머리카락도 눈도 손도 몸도 다 삼촌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런 삼촌이 대단했고 경이로웠다. 그리고 삼촌은 집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영화광이었다. 미국 배우의 이름도 술술 얘기했는데, 나는 그런 삼촌이 신기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삼촌은 세상과 단절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다. 선택적 은둔형 외톨이는 아니었다. 삼촌은 늘 소통하고 싶어 했지만 세상은 그런 삼촌을 '이상한 사람,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 주책인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단절되어 갔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삼촌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외할머니가 하던 폐지 줍는 일을 같이하며 손수레를 끌었다. 삼촌의 나이는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까? 36? 37?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폐지를 줍는 것에 끌끌..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삼촌이 가족 모임에 오면 항상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삼촌이 하는 말들은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삼촌의 더듬는 말투... 기억이 난다. 삼촌의 자신 없던 음성들... 그렇지만 항상 웃었던 모습들... 바보 같은 광대가 된 듯한 삼촌... 나는 그런 삼촌이 나에게 말을 걸면 싫었다. 핸드폰을 신형으로 바꿨다면서 보여주는 삼촌. 나를 볼 때마다 컬러링을 바꿔달라며 어떻게 바꾸는 거냐며 묻는 삼촌이 사춘기 어린 마음에 귀찮기만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삼촌에게 짜증을 부리며 싫은 티를 냈다. 나의 마음의 짐. 나의 죄. 이제는 사과조차 할 수 없는 고인이 되어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아리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기 전 학원 강사 일을 할 때였다. 정신없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편입을 하고 공부를 하는 사이, 삼촌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빠져서는 안 되는 길로 서서히 서서히... 깊숙하게 진창으로 빠지고 있었다. 삼촌은 슈퍼에서 소주를 몇 병씩이나 사서 매일매일을 술로 젖어 살았고 결국은 술이 삼촌을 삼켜버리는 지경에 다다랐다. 힘이 없는 외할머니는 자식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고, 결혼해서 나가 사는 형과 누나들은 애가 탔다. 결국은... 입원. 가족들은 삼촌을 강제로 입원시켜 술을 못 마시게 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삼촌은 외할머니에게 병원에 더 이상 못 있겠다며 빨리 내보내달라며 성화(成火)를 부렸다. 삼촌이 코를 골아 같이 지내던 사람이 심하게 욕을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알코올중독자들끼리 같이 갇혀 있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술을 못 먹으니 폭력성이 나오고 예민했겠지. 하지만 삼촌의 간이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 복수(腹水)까지 차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의 입원에 대한 의지는 단호했다.
그런데 문제는 외할머니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아들이... 괴롭다고 하니 마음이 약해져 큰삼촌에게 작은 삼촌의 퇴원을 종용(慫慂)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작은 삼촌의 승(勝)이었다. 작은 삼촌은 다시 집으로와 술을 마셔댔다.
오랜만에 외할머니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큰삼촌도 있었는데 큰삼촌은 동생이 또 술을 사 와 마시려고 하는 모습에 화가 나 제발 정신 차리라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 매를 맞으며 저항이라고는 소리 지르며 엉엉 우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주눅 든 작은 삼촌을 보니 안타까웠다... 할머니는 때리지 말라며 큰삼촌을 말렸다. 살이 없어 가느다랗고 힘이 없는 파리한 할머니의 손이 큰삼촌의 팔을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큰삼촌은 속상함에 화가 나 있었고 할머니의 그 힘없는 손짓은 종잇장보다 가벼이 흔들렸다. 아... 왜 이리 불쌍한지... 큰삼촌이 가해자인지 작은 삼촌이 가해자인지 외할머니가 가해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장면에서는 그냥 모두가 피해자였다. 각자의 상처 덩어리들을 어떻게 치유할지 몰라 누군가는 술로 자신을 해(害)했고, 누군가는 속상함에 폭력을 했다. 누군가는 자식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기 탓으로 돌렸다. 나는 매 맞은 작은 삼촌의 서러움과 분노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작은 삼촌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큰 이모, 엄마, 작은 이모, 큰삼촌, 작은 삼촌 이렇게 5남매인데 작은 삼촌을 뺀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결혼을 했다. 큰삼촌은 공부를 곧잘 해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무원이 되었고 외숙모를 만나 보통의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았다. 작은 삼촌은 아마 어렸을 때부터 큰삼촌과 비교를 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형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자란 게 아닐까. 게다가 내성적인 기질이다 보니 더더욱 고립되어 갔을지도. 아픈 손가락. 외할머니에게 작은 삼촌은 아픈 새끼손가락이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복수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점점... 삼촌의 피부는 노랗게 물들어 갔고... 간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술을 마시는 삼촌을... 가족들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 탓을 할 수 있을까... 결국은 대학 병원급 큰 병원으로 입원을 했다. 1차 시험에 합격을 하고 삼촌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른 삼촌의 배... 온몸이 노랗게 그야말로 노랗게 질려있는 삼촌을 바라보았다. 의식이 없다가 내가 손을 잡으니 삼촌이 눈을 떴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삼촌이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삼촌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후회인지, 살고 싶어서인지, 죽고 싶어서인지...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삼촌보다 엄마가 더 걱정되었다. 삼촌의 일은 엄마에게 충격일 것이다. 엄마가 아플까 봐... 늘 줄타기 곡예를 하듯 지냈는데. 이 일은 엄마에게 큰 정신적 충격이 될 것이다. 나는 독해졌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 불쌍한 외할머니... 는 괜찮을까...? 지독하게 슬픈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꾸역꾸역 나는 또 이 슬픔을 욱여넣어 본다.
면회를 하고 모든 가족이 외할머니 집에 모였다. 작은 삼촌은 간경화(肝硬化) 말기로, 간이 제대로 해독이나 배뇨 배설 작용을 못했다.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기계로 오줌을 빼고 걸러주는 걸 했었는데 그게 하루에 70만 원쯤 들었다고 했다... 보험도 제대로 없었기에 그 쌓여만 가는 병원비를 감당한 재간(才幹)이 없었다. 가족들은 그 기계를 멈추기로 했다. 아무도 그 단어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포기'였다. 가슴이 저리다. 자기 동생을... 자기 자식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 결정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동의를 하지 않으셨다. 마음이 허락되지 않으셨던 거겠지... 그러나 할머니의 외침은 다수에게 묻힐 뿐이었다. 그저 "어떡하냐.. 어떡하냐..." 하며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큰 이모가 '족발'을 시키자고 했다. 큰 이모는 족발을 '대(大) 자'로 시키라고 나에게 주문했다. 이 말이 왜 이렇게 역설적(逆說的)일까... 나는 글이나 시에서만 역설을 느꼈는데, 아니... 공부를 했는데... 큰 이모의 족발을 시키라는 말이 너무나 역설적이어서 슬퍼 미칠 것 같았다. 그냥 족발도 아닌, '족발을 대자'로 시키라는 그 말이 큰 이모의 슬픔을 대변(代辨)하는 단어 같았다. 나는 자석이 붙어있는 전단지를 들고 전화를 걸어 요청대로 족발 대자를 시켰다. 가족들이 그 족발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가족들은 족발을 씹고 술을 마시며 꾸역꾸역 슬픔 한 조각, 괴로움 한 잔을 마셨을 것이다.
집에서 이틀 정도를 자고 나는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2차 시험이 끝날 때까지 작은 삼촌이 제발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버스 맨 뒷자리 정가운데에 앉았다. 사람들은 꽉꽉 차 있었고, 나는 공부할 쪼가리들을 주섬주섬 꺼내며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엄마의 전화... 덜컥 겁이 났다.
'제발 아니길... 제발... 제발... 하나님...!!!' 엄마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 '그래...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지.'
엄마는 좀 전에 삼촌이 죽었다고 했다. '어떡하냐'며 한스러운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나는 그 조용한 버스에서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흐느껴 울었다. 이럴 땐 엄마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의 떨림이 느껴졌다. '일주일은 버티지... 제발 일주일만이라도 버티지...'
삼촌은 기계를 멈춘 지 채 삼일도 넘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있었다. 돌덩이처럼 굳어가고 숨은 점점 옅어지고 차갑게 식어갔을 것이다. 엄마랑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전화를 끊고 적막만 도는 버스 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너의 깊은 마음을 이해해... 네가 얼마나 가족들을 위해 꿋꿋이 그 시간들을 견뎌 왔는지 알아... 삼촌의 죽음으로 너도 힘들었을 텐데... 네가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도 너만을 위함이 아니라 네가 제대로 서야 다른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거란 생각이 들어 그랬다는 걸 알아. 삼촌의 죽음이 허망하진 않았어? 엄마와 할머니를 두고 버스를 탔을 때 네 마음이 어땠을까... 소리 없이 울음을 꾹꾹 참아내느라 편하게 울지 못했지? 이제... 가끔 삼촌 생각이 나면 울어도 돼. 너무 죄책감 갖지 않아도 돼. 삼촌도 하늘에서 네가 괜찮길 바랄 거야. 이제는 편안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