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즈음 하교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냉장고를 열심히 열고 닫으며 할렐루야를 외쳤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정신없이 찬송가가 흘러나왔는데 그 카세트 플레이어를 냉동실 칸에 넣었다 뺐다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첫 기억이다. 엄마는 동공이 풀려있었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눈은 퀭해있었다. 낯선 엄마의 모습에 나는 당황하고 불안했다. 어찌할 줄 몰라 급한 대로 옆동 아파트에 사는 친한 친구 어머니께 찾아갔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청했다. 친구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에 오셨고 나를 진정시켜 주셨다. 그리고 나서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일이 빨리 지나갔다. 마치 테이프가 빨리 감기듯 전조 증상을 천천히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그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엄마는 불안에 떨며, 어느 날은 교회에 갔다가 어느 날은 절에 갔다. 마음이 불안하니 무언가에라도 의지하려 했던 것 같다. 교회에 많은 돈을 성금 하거나 절에는 결혼반지며 돌반지며 가릴 것 없이 시주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사라져서 언니와 내가 엄마를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닌 적도 있다.
그 싸늘한 거리.
그 불안함에 짓눌리던 공기.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결국 엄마를 찾은 곳은 교회였다. 집 근처에 있던 큰 교회였는데, 거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실성해 있는 엄마를 찾았다. 찬송가를 웅얼웅얼 거리며 정신은 나가있었다. 언니와 내가 왔다는 건 알고 있었을까... 아마 기억에도 없을 것이다. '휴...'엄마를 찾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나는 교회 의자에 빼곡히 앉아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 안에서 가운데 통로로 지나갈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너무나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나와 언니는 엄마의 양팔을 한쪽씩 부축하며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지나갔다. 그때의 전의(戰意)란... 다시는 느끼지 못할 비장함이었다. 나는 언니와 이 창피함의 몫을 나누며 교회 밖으로 나왔다. 나에게 언니는 큰 무기였다. 나는 그 큰 무기가 있었기에 용사(勇士)가 되었고 그 무리를 물리치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무언의 끈끈함과 전우애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외롭지가 않았다.
어느 날은 엄마가 나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을 불러 모아 동그랗게 앉혔다. 엄마는 내 동생이 예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성모마리아라고 하며 이상한 말들을 토해냈다. 내 동생은 고작 5살쯤이었다. 또 어느 날은 아빠 넥타이를 조각조각 자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빠가 바람피울까 봐? 아빠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잘 모르겠다. 언젠가 엄마는 아빠가 나와 잠자리를 했다는 둥 아빠와 내가 이상하다는 둥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건... 정말 충격이어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환각, 환영, 망상과 불안, 공황 모든 것이 엄마를 덮친 듯했다.
모든 일상이 멈춰버렸다. 우리 가족은 분명 평온했던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엄마가 아프고 난 후엔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아니 아빠의 결정은 입원이었다. 엄마는 큰 병원의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 그것이 첫 입원이었다. 친척분들이 몇 분 도와주셨고 나와 언니 그리고 동생도 함께 갔다. 엄마를 힘겹게 입원시키고 온 날, 집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며칠 뒤 엄마가 외할머니께 병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다 달라고 전화했다. 아빠는 일하고 있으니 외할머니께 요청을 한 것 같다. 슬리퍼, 물컵 등등... 정확히 기억나는 건 슬리퍼였다. 외할머니랑 내가 슬리퍼를 사러 갔는데, 나는 천으로 된 실내용 슬리퍼가 필요한지 알고 그걸 샀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화장실용 슬리퍼처럼 고무로 된 슬리퍼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엄마의 첫 면회날, 준비물들을 챙겨서 아빠, 언니, 나, 남동생, 외할머니, 외삼촌과 같이 갔다. 간단히 면회를 했는데 엄마는 전보단 상태가 조금 호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명이서 쓰는 다인실이다 보니 엄마보다 상태가 더 심한 사람들도 있어서 엄마는 그 사람들이 무섭다고 했다. 가여운 우리 엄마... 엄마는 나에게 3만 원을 쥐어주었다. 내가 전에 고데기가 사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두고 쥐어준 것이다. 나는 우선 그걸 받아서 집에 왔는데, 아빠는 그 돈을 내놓으라며 휙 채어갔다. 나는 졸지에... 엄마 상태도 모르고 철없이 행동하는 중학생이 되어버렸다. 나는 서러워서 눈물을 폭풍같이 쏟아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에 앉아 엉엉 울었다. 외삼촌이 그걸 보더니, 고데기를 못 사서 운지 알고 토닥여줬다. 나는... 그게 아닌데... 나는 엄마가 가엽고 눈물이 나고 이 상황이 감당이 안되고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는 건데... 어른들이 미웠고 내가 진짜 나쁜 딸이 된 것 같아 속상하고 서러웠다.
엄마가 입원을 하고 나니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컸다. 빨래, 청소, 음식... 언니는 고등학생, 나는 중학생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서툴렀다. 우리는 엄마라는 무게를 몸소 느끼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지만 빨래나 청소 그런 것쯤은 익숙해지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엄마의 부재 자체가 힘들 뿐이었다. 제발 하루빨리 나아서 돌아오길 바라며... 하루하루가 지났고 한 달이 겨우 되어서야 엄마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엄마가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엄마의 상태는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를 반복하며 우리의 삶도 함께 파도를 탔다.
너도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는데... 어른들이 널 봐주지 않았지?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겠다... 어린 나이에 그 상처를 감내하느라 정말 고생했어... 누구라도 그건 상처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그것만 해도 칭찬받을 일이야... 그 모든 시간을 잘 견뎌와 줘서 고마워,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