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도착해서 가장 빨리 적응하는 방법은 바쁘게 일하는 것이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천천히 하자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가만히 두질 않는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현장에 온 그날부터 현장의 진행사항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현재 프로젝트 진행현황 파악이었다. 나보다 먼저 현장에 파견 나가있던 후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공사의 어떤 부분이 완료되었고 어떤 부분이 진행되고 있고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설명으로만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바로 안전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갔다. 역시나 실제 눈으로 보니 후배가 이야기했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데 금방 이해가 되었다.
대략적인 상황파악이 끝난 후 시운전 팀 모두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미팅을 시작했다. 미팅 첫 안건은 지금까지 공정구분 없이 통합적으로 해왔던 일을 공정별로 담당자를 정하는 것이었다. 총 6개였던 공정을 각각 2개씩 맡기로 했다. 그래야 책임감 있게 자신의 공정을 맡아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 동기부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해야 맡은 공정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수 있고 현장 진행 사항도 잘 파악할 수 있다. 시운전 업무 중 모든 공정에서 공통적으로 진행되는 업무도 있지만 특정 공정에만 진행되는 업무도 있기 때문에 담당자를 선임은 아주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공정 외 시운전 업무에 대한 담당자 선임 작업이었다. 앞으로 많은 시운전 인원들이 현장에 부임하게 되는데 이 인원들을 관리하는 업무, 시운전 작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관리 및 기록, 외부업체를 통한 시운전 작업을 위한 계약 및 업체 관리, 각 공정별 데이터를 수집해 통합 스케줄 및 보고 자료 작성 등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 업무들은 전체를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다. 특히 비용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기에 예산을 관리하는 팀과의 협업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시운전 일 특성상 긴급히 외부로 나가 사는 자재들도 많고, 정량적으로 물량을 계산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예산 관리 담당자를 설득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업무는 새로운 담당자를 선임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을 맡고 있는 엔지니어들이 나눠서 진행을 했다. 전체적인 관리 업무만 맡아서 하는 엔지니어가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상 어렵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야 하기에 한 사람의 엔지니어가 맡아서 하는 일은 끝이 없다. 초기부터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기에 메니져님은 공정 외 대부분의 업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현장 파견 초반부터 엄청난 부담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운명인 것을.
JV로 같이 일을 진행하는 파트너 사의 메니져님과 엔지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드디어 JV 시운전 팀의 조직이 갖춰나가고 있었다. 우리 회사의 메니져님이 통합 JV메니져를 맡고 각 사의 업무는 각 사의 메니져들이 관리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엔지니어들과 현장 작업반장님들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현장으로 부임할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일이 많아진다는 것. 시운전 일이 많아지기 전에 현장에서 준비하는 것들이 중요한 이유이다.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준비해 놓았던 시스템을 이용해야 한다. 일이 바빠지면 할 수 없기에.
전체적인 세팅이 끝나고 정기적으로 해야 할 일들도 정해졌다. 시운전 팀 회의, 프로젝트 전체 회의 그리고 발주처와의 회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회의는 빠질 수가 없다. 일이 아무리 바빠도 진행사항 공유해야 하고 문제점이 발생했을 때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가끔 불필요한 미팅도 있지만 꼭 필요한 회의들이 더 많았다. 지금은 많은 일이 진행되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이지만 앞으로는 문제점에 대한 원인 분석과 해결책에 관련된 내용이 더 많아질 것이다.
발주처는 항상 시운전 팀이 현장에 빨리 나오기를 원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같이 논의하기 위해서. 하지만 일찍 나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대부분의 초기 업무는 이메일이나 화상미팅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시운전 팀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일이 많지 않다.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소의 인원으로 발주처의 마음을 얻어내기가 쉽지가 않다. 일 할 사람이 있으면 없던 일도 만들어내는 것이 현장이다. 언제 현장을 나갈지 결정은 회사입장에서나 발주처 입장에서나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나와 시운전팀 모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