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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쥐 Aug 20. 2024

오늘은 엄마 빼고 정신병원 2

막내 "예전에 할머니가 친구분들이랑 절에 놀러 갔는데 다들 놀다 보니 시간이 늦어진 거야. 그래서 절에서 하루 자고 가라 한 거지. 근데 그땐 할아버지 더 젊었을 텐데 할머니가 할아버지 눈치 보여서 자고 가겠다고 했겠냐?"


나 "못하지. 그래서 할머니가 집에 바로 갔잖아? “


막내 "그래! 마침 같이 왔던 일행 중에 다른 여자분도 집에 가야 한다고 했나 봐. 그래서 두 분 다 집에 돌아간 거지. 근데 할아버지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할머니가 차에서 내리는 걸 봤고, 그 뒤로 매번 그 차 얘기가 나오는 거임"


나 "내가 볼 땐, 할아버지가 그거에 꽂혔어. “


아빠 "으휴! 요새 너희 엄마도 나한테 와서 똑같이 그런다. 의부증, 의처증 이런 것도 유전인지, 옮는 건지.

이번에 나한테 와서 너희 외할아버지 하는 거 고대로 하는데 미치겠다, 아주! 10년 걸려서 너희 엄마 우울증 거의 고쳐놨더니, 외가댁 갔다 온 지 2주 만에 10년 다 도루묵이다. 아휴, 진짜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나 "근데 이 정도면 전생에 왜구였던 거 아냐? 어이 히데요시~"


아빠 "큭! 아, 시끄러워."


막내 "앜!ㅋㅋ"


정신병원에 도착했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엄마의 주치의 분께 상담을 요청했다.

정작 환자인 엄마를 뺀 우리가 주르륵 들어가는 그 순간이 왜인지 웃겼다면 나도 제정신은 아닌 걸까.


머리가 새하얀 주치의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 분이다.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가 멋있으신 분인데 병원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선생님을 지휘자로 착각했을 거라고 종종 생각한다.


선생님은 나를 보곤 “아, 첫째 따님분도 오셨나 보네요?"라고 인사를 해주셨다.


사무실 소파에 아빠, 막내, 나 순서로 앉았다.

아빠는 긴장하거나 어떤 일을 설명할 때 항상 날짜나 숫자를 먼저 말하는 습관이 있다.


아빠 "에, 이제, 저희 와이프가 5월 20일 이제 여기 병원을 퇴원하고 얼마 안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하고 밀어붙여서… 지금 저희 집이 두 개가 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한 곳에는 이제 와이프, 장모님, 장인어른, 막내딸이 이렇게 살고 있고요. 저랑 와이프가 살던 곳에는 현재 제가 지내고 있는데 아내가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합니다."


선생님은 길어지는 아빠의 얘기에 집중이 흐려지는지 미간을 약간씩 찡그리며 양쪽 손을 손가락끼리 맞닿게 한 채로 본인의 손가락을 쳐다보고 계셨다.


아빠 "선생님, 우리 와이프가 다른 사람들한텐 다~ 천사표예요. 근데! 저만 보면, 제가 바람이 낫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 장인어름 이름이 OOO인데 여자 OOO이라고 보시면 돼요."


선생님 "그러니까 지금 할아버지의 의처증이 심한데 환자분도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거군요."


상담을 받기로 한 건 우리지만 선생님의 찡그려지는 미간을 보며 나는 괜스레 초조함을 느꼈다.

일단 타오르는 불부터 급하게 끄자는 심정으로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나 "선생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이렇게 의처증이 심해지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할아버지를 말리긴 해도 어차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고요. “


선생님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망상증의 경우에는 맞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너무 지쳐서, 지나가는 말로라도 '그래, 네가 맞아. 네 말이 맞는 걸로 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아, 역시 내가 의심한 게 맞았구나'라고 생각을 굳혀버리기 때문에 끝까지 아니라고 하셔야 해요."


아빠 "그러면 다음에 왔을 때 저희 와이프도 치료를 좀 하고 약을 먹던지 해서…."


선생님 "아, 아버님이 말씀하신 바람피운 상황이 사실인지 아닌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의처증이나 의부증 같은 경우에 완치는 불가합니다. 생각을 바꾸는 약은 세상에 없어요. 다만 환자분으로 하여금 '바람을 핀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향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글을 읽는 것 마냥 진부한 말이기도 했지만 전문의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괜스레 더 수긍이 갔다. 하지만 오늘따라 냉랭한 선생님의 태도에 괜히 움츠러드는 느낌도 들었다.

 

나 "그럼 의심을 정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정도가 최선의 치료인 거네요."


선생님 "그렇다고 봐야죠."


아빠 "아, 선생님.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막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사 온 뒤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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