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욱곤 Sep 22. 2023

괜히 노트는 줘 가지고

잠시 분란만 일으켰습니다.

(이미지출처:네이버스토어) 


마침 제 진료실에서 사용하지 않던 노트 몇 권을 집어 제가 근무하는 수술실에 넘겼습니다. 크기에 상관없이 노트는 그들에게 상당히 쓸모가 많습니다. 노트를 받아 들고 좋아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음날 간호사실을 지나다가 익숙한 노트 한 권이 데스크에 올려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예쁘게 단장까지 마친 그 노트의 용도를 물어보니 익명게시판이랍니다. 그 노트에는 힘들었던 일, 푸념, 섭섭한 것을 적을 수 있고 응원의 글이라든지 칭찬까지 아우르는 만능 게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 밖으로 호응도가 좋았습니다. 힘들었던 일들을 슬쩍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두 줄의 문장으로 재치 있게 잘 표현하고 있었고 그 문장은 직원들의 짜증을 뱉어버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습니다. 노트를 기증한 제가 더 뿌듯했습니다. 아울러 서로 격려하는 내용도 실어주고 덕담도 올려주는 그 이면에는 장난스레 약도 올릴 줄 아는 기지들도 부릴 줄 알았습니다. 제법 괜찮은 기능을 가진 귀한 보물로 자리매김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그래봤자 어제의 일입니다. 단 한 줄의 문장이 그렇게 큰 파장으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특정 직원에게 섭섭하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은 묘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당한 사람이 견뎌야 할지, 언짢아도 되는지 그 기로(岐路)에 서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어제가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글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설상가상으로 눈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댓글까지 서너 개가 달렸습니다. 딸랑 두 글자, ‘나도!’ ‘나도!’      


언뜻 보면 별일도 아닙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목된 그 직원의 심사(心思)가 내내 안 좋은 게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자기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섭섭하다니요? 과연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이 생길 판입니다. 저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 노트를 회수했습니다. 그러면서 수간호사에게만 상황 설명했습니다. 이럴 목적으로 노트를 준 게 아니다. 더 놔두어서도 안 되겠다. 분위기만 나빠질 것 같아서 회수하겠다!          



그렇게 신문고 같던 노트는 없어졌습니다. 좋은 노트였는데 없앨 필요까지야! 좀 씁쓸한 내용이라도 그게 악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라면 놔둬도 되지 않을까? 싶겠지만 제게는 직원들의 화합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경영진이 아닌 이상 굳이 앞서 나설 필요까지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노트를 다시 주세요, 주장해도 새로운 노트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다시 시작하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가 속한 조직원이 순탄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갈등이 없는 조직은 없을 테지만 매사 조용히 순리대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올시다. 평화주의자라 불러도 좋고 온건하다고 해주어도 좋겠는데 일부 표현이 과격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우유부단하다, 능력 없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심지어 젊은 날, 누군가는 피하기만 한다면서 비겁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모두 맞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더 나아가 조직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이 가장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아!라는 대화가 되면 가장 좋겠지요. 반면 두고두고 기분이 나빠지는 대화는 결코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대화의 기술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성품이 받침이 되어야 하고 반드시 교육받아 습득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능력이요 자유의지는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5~7절의 말씀입니다.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세상사는 일이 이래서 어렵습니다.     


이전 03화 명절 선물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