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그 다육이는 없어요.
아마 한 이십 년 전쯤이나 됐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지인에게 다육이 하나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것이 마침 제 미모를 한참 뽐내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화분도 마침 딱 어울리는 그릇에 담겨 왔습니다. 바로 제 진료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잎도 통통하고 때마침 꽃대도 하나 올라왔는데 예쁘기가 마치 새색시 같습니다.
그 이후로 얘는 호강하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주인에게 문안도 받고 이삼일에 한 번씩 물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입니까? 일주일도 못 되어 시름시름 앓더니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고 그날 오후에 바로 운명하셨습니다.
생각하면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애통하기만 하고, 무심하게 대했다면 모를까 예뻐서 애지중지하던 중인데 이렇게 쉽게 가다니요? 그런데 나중에 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흘려들었는데 원인은 물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자주 주어서 그런답니다. 그러니 그렇게 허망하게 일주일도 못 가 회생 불가능의 상태로 가더라지요.
그와는 별개로, 저나 아내나 화분과는 궁합이 안 맞는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많은 식물을 보낸 경험이 있습니다. 잘 키운다고 정성도 기울이고 비료도 잘 주지만 이상스러울 만큼 말라버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보약이 되었는지 지금은 젊을 때처럼 허망하게 예쁘고 고운 나무나 꽃을 쉽게 보내지는 않지만, 그때는 정말 야속하리만큼 애탄 적도 많았습니다.
이 화분 덕분에 요즈음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아! 이런 마음이겠구나. 얼마나 예쁠까? 이런 따스함을 화분을 통해서나마 느끼고 배우는 중입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단순히 예뻐하는 마음만 가지고 키운다는 건 어렵고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상대에 대해 알고 배우고 길러야 내가 하는 행동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관심과 손길을 기대하는 사람, 무심한 듯 조용히 바라보며 응원만 해 주어도 좋아하는 사람 등등 사람의 성향도 얼굴만큼이나 참 다양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성향에 맞추는 일은 일종의 배려에 속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대하는 것은 관계를 깨트리는 지름길이라 생각하는 중입니다. 아니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전자와 후자를 잘 섞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키워 봐야 그리고 더불어 살아 봐야 깨우치는 지혜가 많습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지혜도 내게 넘치도록 풍부해지면 더욱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