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도 못 드리고 삽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6년 총 18년을 학교에 다니다 보니 제가 모신 스승님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듭니다. 게다가 석사과정을 위해 대학원 2년, 인턴 레지던트 때의 스승님, 교회학교 선생님까지 합한다면 나 한 사람을 위해 정말 많은 분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올바른 역할을 하며 지낼 수 있을까? 사뭇 경건해집니다.
오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문득문득 제가 모셨던 선생님들을 주마등처럼 기억할 때가 있습니다. 방금만 해도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다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친 분이 누구실까? 반추하는 중입니다. 오늘의 내가 어찌 나의 힘으로만 되었겠습니까마는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때에 맞추어 나를 이끄시는 선생님들을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진심으로 아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이 부정적인 성향을 어찌하오리까? 싶지만 이런 상념이 들 때마다 항상 가시와 꽃이 늘 공존한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제 안에 미움을 키우신 분과 존경을 키우신 분이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동시에 따라다닙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훌훌 털어버리면 좋겠지만 기억의 밭에서 끈질기게 솟아나는 잡초처럼 돋아나고 또 돋아나는 중입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는 날까지 내 안에 따라다닐 터이지만 그냥 솟아나면 나는 대로 놔두려 합니다. 없애리라 맘먹어도 뿌리째 뽑힐 것도 아니요, 설령 뽑혔다 해도 그 씨가 또 싹을 틔울 게 뻔합니다.
다행인 것은 내게 존경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남으신 선생님께서 그 쓰디쓴 기억마저도 폭신하게 덮어준다는 사실입니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선생님의 그 사랑은 오롯이 나에게만 향한 게 아니라 모든 아이에게 향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본래 선생님의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시다는 데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잘해주어 싫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 병적으로 집착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지나 내 삶을 돌아보니 그 결심이 타인에게만 해당하는 원칙일 뿐, 내 가족 특히 내 아내에게는, 되려 함부로 대하고 험하게 말하는 나 자신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이율배반(二律背反)의 삶인지 모릅니다.
삶에서 감정이 살아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잘해주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자주 보아야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몰랐던 단점이 보이고 허물이 보이면서 상대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점점 재조정되어 갑니다. 초심이 흔들린다는 건 우리의 평가 기준이 흔들린다는 표식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련의 생각 덕분에 존경하는 선생님이 더욱 존경스러운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시는 선생님은 그 아이의 부(富) 부모의 직업 등은 평가 기준에 포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고우신 성품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여동생의 담임을 하시던 때의 일입니다. 그 반에 탁구선수를 하던 여학생 동기가 한 명 있었습니다. 하루는 수업 시간 도중에 그 아이에게 “영자는 열심히 해서 나중에 이에리사 선수처럼 훌륭한 선수가 되어라.” 격려해 주셨답니다. 당연히 친구들은 옆에서 피식피식 웃어대기 바빴지만 실제 그 아이는 몇 년 후 양영자라는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개인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건 한마디의 말이고 하나의 표정입니다. 마치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바람을 알 듯, 보이지 않는 사람의 진심은 이렇게 말과 표정으로 대변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선생님의 존함은 국민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셨던 박병국(朴炳國) 선생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