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으로 불릴 때

by 은진

바닷가를 걷던 주말 오후, 소금기 섞인 바람 속으로 솔향이 스며들었다. 깊게 들이마시며 숲을 벗어나자, 바람에 흔들리는 꽃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모래밭 가장자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 해당화였다.


처음 그 꽃을 본 건 몇 년 전이었다. 직장을 계속 다닐지, 그만둬야 할지 매일같이 고민하던 때였다. 직장으로 향하는 길이 점점 멀게 느껴졌다. 답을 찾지 못할 때면 가장 먼저 태안 바닷가가 떠올랐고,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찾았다. 넓은 백사장 앞에 서면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고, 온갖 근심이 파도에 실려 멀어졌다.


해안사구에는 해당화가 유난히 많았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온 내게 그 꽃은 늘 보던 장미보다 낯설었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다가온 향기를 맡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밤마다 뒤척이던 불안도 가라앉았다. 그 불안의 밑바닥에는 늘 같은 질문이 있었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 답을 찾기 위해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당화는 화려하지 않다. 어디서든 잘 자라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줄기엔 가시가 있고, 꽃잎은 며칠 못 가 떨어진다.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은은한 향을 멀리 남긴다. 모래밭 끝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제자리를 지키며 피어나는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향기를 잃지 않던 그 꽃을 보며,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 '별칭을 하나씩 지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집사나 장로 같은 직분 대신 서로를 부를 이름을 만들자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장미', 밤을 환하게 밝히는 '보름달', 변함없이 한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처럼 각자에게 어울리는 이름 말이다. 수많은 이름이 떠올랐지만, 나는 나와 닮은 것, 혹은 닮고 싶은 것을 찾았다. 고민 끝에 '해당화'라는 이름을 골랐다. 그 꽃을 만나러 가던 나를, 그 향기 속에서 편안했던 나를 떠올렸다.


처음엔 이런 이름 짓기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불려 왔고, 교회에서 받은 직분도 이미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서로의 이름을 들으니, 각자의 바람이며 현 상황이 드러났다.


시절님, 호박님, 빈들님…. 하나같이 멋지고 뜻깊은 이름들이었다. 호박님은 누구에게나 푸근한 웃음을 건네는 사람이었고, 빈들님은 늘 고요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어주었다. 그중에서도 자신을 '시절'이라 부른 분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평생 못나게 살았다며 스스로를 낮췄는데, 충청도 사투리로 시절은 모자란 사람, 곧 바보를 뜻한다. "나는 그저 시절이여." 그분은 늘 그렇게 말했지만, 누구보다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본명보다, 직분보다, 그 이름이 주는 울림이 더 컸다.


'해당화'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비로소 내 모습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스스로 짊어진 책임과 기대에 눌려 힘겨워하던 나는, 그 이름 안에서 조금씩 평안을 찾았다.

마음이 가라앉자, 하고 싶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결국 나는 오래 망설이던 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금은 글쓰기에 마음을 두고 있다.


이름이 가져온 변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는 각자가 품은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이름은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좋았다. 먼 거리를 찾아가서 만난 작은 교회였지만,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교회가 없어졌다. 도시 개발 지역으로 편입되어 교회가 있던 천변 마을이 흔적 없이 사라졌고, 교인들도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건물은 사라졌어도 그곳에서 나눴던 이름들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그때의 이름으로 부른다.


"해당화님, 잘 지내셨어요?"

"시절님, 오래간만이에요."


이름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가끔 만나 '해당화'라고 불릴 때마다, 나는 다시 바닷가 모래밭 끝에 선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향기를 잃지 않던 그 작은 꽃이 된다. 그 꽃을 보며 견디고 싶었던 마음, 그 마음이 아직 내 안에서 잔잔히 울린다.


by 은진, 해당화 묘목을 뒷마당에 심었다. 바람에 실려온 향은 울타리를 감싼 장미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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