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전화기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연이 남편이었다. 이른 시각에 걸려온 뜻밖의 전화였지만, 반가운 마음에 인사부터 건넸다.
"오래만이네, 잘 지냈어?"
"집사람이 많이 아파. 지금 중환자실이야."
"아니, 왜?"
그의 낮고 어두운 목소리에 담긴 소식을 듣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친구 연이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나는 대학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인연이다. 두 사람이 사귈 때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나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연이가 지금의 남편과의 만남과 청혼을 이야기하던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날 부를 것만 같다. 복도 끝에서 "친구야, 커피 마시자!" 하고 외치면, 복도 전체를 울릴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한층 더 당찬 모습이었다. 그런 씩씩하고 활달했던 연이의 삶이 한순간에 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출근길에 갑자기 쓰러진 연이는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교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실컷 놀면 되겠네." 일부러 농담처럼 말했지만, 연이는 예전처럼 웃지 않았다.
"내 인생은 학교에 있어. 다시 나가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쓰며, 이제야 원하는 삶을 살게 된 줄 알았다고 했다. 실제로 연이는 일찍부터 유화를 배우고 전시회를 열며 지역에서 화가로 활동했고, 아이들을 위해 동화도 몇 편 썼다. 앞길은 순탄해 보였다. 그런 연이가 "모든 걸 잃은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빨리 나아 같이 근무하자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우리는 함께 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근무지를 옮겨야 했고, 연이가 같이 근무하자고 제안했다. 친구가 곁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 계획에 동의했다. 마침 연이가 근무했던 곳으로 그해 나는 발령을 받아 옮겼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까이서 지내자는 약속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연이가 갑작스레 입원해 돌아오지 못하자, 우리는 그 상황을 못내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만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병이 있어도, 관리만 잘하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내 눈에는 여전히 젊은 나이였으니까. 늘 씩씩한 걸음과 호탕한 태도는 어느새 힘을 잃고, 깊은 그늘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가끔 생각이 나 연락을 해도, 돌아오는 건 생기 없는 목소리 뿐이었다.
"막상 직장을 떠나고 나니, 다들 나를 멀리하는 것 같아.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연이 남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병간호에 지쳐보였다. 호전되지 않는 환자를 돌보며 직장까지 다니는 일은 고단했을 것이다. 전화 너머로 전해오는 그의 말에는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마음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간밤의 폭우에 담벼락의 쑥부쟁이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타는 듯한 햇볕에 시들어 있던 줄기들이 거센 비바람에 꺾여 쓰러져 있었다.
그 쑥부쟁이는 연이 남편이 자신의 정원에서 직접 캐서 건네준 것이다. 아파트에 살던 내게 줄 만큼 친구 부부는 정원 가꾸기에 재미를 붙였고, 나는 그 모습이 좋아 주는 대로 받아들였다. 소박하지만 예쁜 들꽃이었다.
'어디에 심어도 잘 산다'는 말만 믿고, 바로 심지 못한 채 주말까지 기다렸다가 고향집 담벼락에 옮겨 심었다. 시들어가던 모종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곧 뿌리를 내리고 다부지게 올라오는 줄기를 보며 그 생명력에 적잖이 놀랐다. 해마다 옆으로 퍼져 이제는 초록 울타리가 되어 집을 감싸고 있다. 그 강인한 들꽃처럼 연이가 끝내 버텨주기만을 바랐다.
"연명치료는 안 하기로 했어."
다시 전해온 연락은 버티기를 바라던 내 마음과 어긋났고,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연이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절감했다.
너무 이른 나이였다. 아무리 중병이라도 이렇게 빨리 손을 놓을 수는 없다고, 더 붙잡아야 하지 않느냐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끝내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머지않아, 받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 도착했다.
그리고 바람처럼, 친구는 떠났다.
햇살이 쏟아지던 너무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뜨거운 여름과 폭우, 거센 바람이 스쳐가도 쑥부쟁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선다. 뿌리만 남아도 싹을 틔우고, 보일 듯 말 듯 흩어져 있다가도 모이면 연보랏빛으로 가을을 고요히 물들인다.
곧 가을이다. 그 꽃이 피면, 친구가 남긴 손길이 담벼락을 감싸며 보랏빛 물결로 일렁일 것이다.
쑥부쟁이가 환하게 피는 이번 가을에는 연이 남편이 오기로 했다. 이제야 시골집을 정리하고 마침내 초대했지만, 정작 연이는 오지 못한다.
쑥부쟁이가 꽃봉오리를 맺고 있는 걸 보면서 생각한다. 아직 찬란할 수 있었는데, 너무 빨리 떠난 친구가 안타깝다. 가을이 오면, 나는 또다시 그 부재를 느끼겠지. 담벼락 가득한 연보랏빛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