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일어나 보니 어느덧 초저녁, 그리하여 첫날은 호텔 주변 쇼핑몰 구경과 식사로 간단히 마무리 짓고 대망의 둘째 날, 본격적인 하와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이 밝았다.
파워 J 엄마의 여행 가이드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전 일정은 내내 순조로움 그 자체였다. 뭐 하나 틀어지는 일 없이 잘 짜인 대본처럼 흘러가는 시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식재료와 준비물 중 완벽한 오늘을 위한 것들을 챙겨 출발. 뭐 하나 빠진 게 없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무려 2개월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오지 않았던가. 의상도 끝내준다. 누가 봐도 하와이, 불과 몇 시간 만에 하와이 아줌마 다 된듯한 휴양지룩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나는 아이들을 앞세워 첫 일정인 호놀룰루 동물원으로 향했다. 나무늘보니 거대한 뱀이니,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물원 중간중간의 놀이터와 벤치에서의 간식, 모든 것이 완벽했다.
Cheeseburger in Paradise
점심까지 맛있게 먹고 드디어, 오후 일정은 우리 첫째가 제일 좋아하는 모래놀이다.
호텔에서 해변까지는 도보로 단 2분 컷. 호텔에서 래시가드로 갈아입고 모래놀잇감을 챙겨 해변으로 향했다.
내가 여행책과 블로그에서 보던 풍경 그대로였고, 즐겁게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정말 행복했다. 이곳에서 무탈하게 하루, 이틀을 잘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다.
이런 생각도 잠시, 사건의 시작이 된 남편의 한마디,
“나 바다 수영 잠깐 하고 와도 될까?”
결혼 전, 남편은 수영을 잘해서 동대표로 수영대회에 여러 번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후, 내가 남편의 수영하는 모습을 본 건 실내 수영장에서 두 번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도무지 망망대해 하와이 바다에서 혼자 수영을 다녀오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잔잔하던 파도가 거세게 느껴졌다. 남편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 깊은 바다를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남편은 오십견으로 한쪽 어깨를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기에 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하와이까지 와서 바다 수영을 한 번도 못 하고 가는 것은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다며 안전한 곳에서 잠깐만 하고 올 테니 걱정 말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 ‘잠깐’이 화근이었다. 남편의 ‘잠깐’과 나의 ‘잠깐’은 갭이 너무나도 컸다. 잠깐만 다녀오겠다는 남편은 3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잠깐은 15분이었는데, 그 두 배의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바다 수영하러 간지 20분 째부터 30분까지의 10분 간격이 마치 10시간처럼 느껴졌다. 온갖 불안과 걱정이 나를 엄습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심정이 떠올라 살짝 손이 떨린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때의 10분은 내 인생 최악의 10분이었음은 변함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나는 파워 J일 뿐만 아니라 파워 걱정러이기도 하다.
그걸 잘 아는 남편이 30분이 넘도록 수영할 리가 없는데, 나 이제 어떡하지?
평화로운 모래놀이
벌떡 일어나 둘째를 한쪽 팔에 들쳐 안고, 다른 한 손은 첫째의 손을 잡고 바다 가까이 갔다.
많은 인파 속에서 당연히 남편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 래시가드도 전부 검은색이라 더욱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빠 찾으러 바닷속으로 들어가자는 큰 딸의 말이 평소 같으면 순수하고 귀엽게 들렸을 텐데 전혀 와닿지 않았다.
모래사장에 발은 또 왜 이렇게 푹푹 빠지는지, 발에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조금 전까지 와이키키 해변을 보며 감사로 충만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여기를 왜 와서 이러고 있나, 뉴스에 나오는 건 아닌가’ 별 생각을 다 하며 눈앞에 보이는 해양구조대로 향했다.
"I’m looking for my husband!”
나의 이 한 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아이들에게 집중되었다. 두둥, 시선집중.
울먹이는 나를 구조대원이 친절하게 안심시키며 남편의 인상착의를 물었다. 키와 몸집, 검은색 래시가드 착용, 물안경 옆 쪽에 빨간색 포인트 줄무늬 특징을 말하면서도 지금 물안경 옆에 있는 빨간색 포인트가 보이기나 하겠냐마는 뭐라도 눈에 띄는 점을 이야기해야 했다. 아, 그리고 남편 검은색 상의 팔뚝에 형광 노란색으로 글씨가 써져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구조대원과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영어 전공했나 보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분위기 파악이 빠른 첫째는 두리번거리며 ‘아빠! 아빠!’를 외쳐댔다. 아직 어린 둘째는 내 품에 안겨 천진난만하게 쪽쪽이 대신 엄지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해변가에서 구조대까지 걸어가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동안, 10시간 같은 10분이 또 흘렀다.
구조대원이 “Okay”를 외치며 출동하려고 구조대쉘터 계단을 내려오려던 그 순간, 손가락으로 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Is that him?”
고개를 돌려보니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편이다. 남편을 보는 순간, 나는 울고 말았다.
오랜만에 바다 수영을 해서 너무 힘들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그,
바다수영은 기본 30분 이상이라며 웃으며 말하는 그,
울고 있는 나와 아빠를 보자마자 좋아서 안기는 아이들을 보며 남편이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자기야? 그 순간,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확 느껴졌다. 너무나도 뜨겁게... 어디선가 한국말로 들리는 한 아주머니의 외침, “아빠가 혼자 너무 즐겼네.”
온갖 창피함과 부끄러움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남편의 래시가드 팔뚝에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 알아차렸다는 구조대원의 말에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알 수 없는 한 문장, ‘The sky is the limit.’
구조대원이 미소를 지었다. 구조대원의 미소는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 네 식구가 얼싸안는 모습을 보며 지어진 흐뭇한 미소였을까, 아니면 출동도 하기 전에 문제가 해결되어 저절로 나온 미소였을까? 상관없다. 남편이 살아 돌아왔으니까!
구조대원에게 “Thank you.”를 한 열 번쯤은 말하고 모래놀이 하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은 계속 웃으며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나는 마저 울었다. 웃고 울었던 하와이 여행의 둘째 날이 저물어갔다.
와이키키 해변의 석양을 바라보며, 성격 급한 나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 기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