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관을 떠올려본다. 방과 후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회사 단체 행사를 통해 야구장에 처음 가게 되었다. 그동안 TV로도 야구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생 첫 야구 경험이었다. L사 직원인 우리는 당연히 잠실 야구장에 LG트윈스 홈경기를 보러 가게 되었다. 나는 당시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따끈한 신입사원이었기도 하고 3천 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대규모 관람이라 묘하게 들떠있었다. 팀원들과 치킨과 맥주를 바리바리 사서 외야석에 딱 앉자 드넓은 야구장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야구의 룰도 모르는 나조차도 벅차게 만드는 무엇가가 그곳엔 있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직관은 문득문득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직관 준비물은 무엇이 있을까. 응원하는 선수의 이름과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 야구장 기념사진을 장식할 머리띠? 아님 우리 팀만의 응원도구? 당연히 이런 것들도 있으면 좋다. 하지만 야구장의 품은 넓다. 이런 거 하나 없어도 경기 티켓만 있으면 모두를 받아준다. 심지어 타 팀 팬들이 오더라도 환영하는 곳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바로바로 텅 빈 위장과 강한 목청이다.
나의 영원한 직관 푸드 김치말이국수와 삼겹살정식
야구장은 먹거리로 가득하다. 예전엔 당연히 야구장 하면 치킨과 맥주였지만 사실 그건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일단 야구장에 들어서면 김치말이국수에 삼겹살 정식부터 시키고 시작한다. 더운 여름날, 살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시원한 김치말이 국물을 들이켜면 '이 맛에 야구장 오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조합은 한국인 불패 조합이기 때문에 친구들을 데리고 올 때마다 무조건 먹이는 코스다. 얘들아, 맛있지? 나랑 다음에 또 야구장 오는 거야? 약속!
식사는 빠르게 2회 전까지 와구와구 먹어 배를 든든히 채워둬야 한다. 그래야 공격 순서에 번쩍 일어나 응원을 할 수 있다. 열심히 응원하다가 배가 꺼져도 걱정은 없다. 우리에겐 순대 볶음, 피자, 만두, 어묵, 닭강정이 있다. 아차, 홈런볼도 빠질 수 없지.
자자, 팬 여러분! 열심히 식사하시던 와중에 죄송합니다. 우리의 공격 순서가 왔습니다. 다들 젓가락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그렇다. 직관러는 밥 먹으랴 응원하랴 아주 바쁘다. 수비 때 먹고 공격 때 응원하는 루틴이다.
'하지만 전.. 응원가를 모르는데요?'
노 프라블럼. 우리에겐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들이 있다. 그분들이 관중석 앞 단상에서 율동과 함께 응원을 북돋아주시기 때문에 잘 몰라도 천천히 따라 하면 된다. 어차피 야구 응원가라는 게 기교를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르는 것에 의의가 있기 때문에 가사와 멜로디가 매우 직관적이다. 그래서 한두 번 부르다 보면 어느새 응원 단상을 보지 않고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직관 응원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큰 목소리이다. 응원단 전체가 한 목소리를 내어 그 큰 야구장을 왕왕 울릴 때면 진짜 온 가슴이 뻐렁친다. 상대 팀 응원 소리도 맞은편에서 들으면 아주 장대할 때가 있는데 스포츠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서로 리스펙 하기도 한다.
6월에 부모님과 함께 한 직관
지난 6월, 부모님을 모시고 야구장 직관에 다녀왔다. 엄마는 한 번씩 서울에 놀러 올 때마다 내가 데리고 가서 3번째 가는 것이었는데 아빠는 사실상 첫 직관이었다. (젊었을 적 사직 야구장에 1번 가보긴 했다고 하셨다.)
원래 아빠와 집에서 야구를 보면나는 직관 온 것 마냥 응원가도 부르고 율동도 하는 편이고 그때마다아빠가 정신 사납다고 제발 앉으라고 타박을 주었다. 하지만 이날 이후로 아빠의 반응이 완전히바뀌었다.
아빠는 야구장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인파에 첫 번째로 놀랐다. 이리 많이 야구를 보러 온단 말이가? 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와중에도 인파를 뚫고서 자신이 좋아하는 우리 팀 1번 타자를 유니폼에 마킹하던 들뜬 얼굴이 기억난다. 두 번째로 치맥이 아닌 김치말이 국수에 놀랐다. 계속 치맥, 치맥 노래를 부르길래 진짜 치맥을 준비해야 하나 하다가 그래도 나의 한국인 정통 코스를 밀어붙였는데 되게 좋아하셨다. 나중에 한 그릇 더 사 먹었다. 관중석을 돌아다니는 맥주보이가 이제는 카드 계산도 받는다는 것에 덤으로 놀랐다. 마지막으로 응원 함성 소리에 놀랐다. 특히 이 날은 주말 잠실 더비 경기로 전 석 매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 팀 합쳐 홈런이 4개나 터진 엄청난 날이었다. 그만큼 응원 열기가 대단했다. 가오 있는 경상도 남자라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쭈뼛쭈뼛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뻑뻑뻑 쳤다. 첫 직관 첫 승리를 맛보고선 집에 와서도 샤워 중에 응원가를 흥얼거리고 소파에 누워 하이라이트 영상을 내내 돌려보았다.
이제는 내가 옆에서 가만히 야구를 보면 오히려 아빠가 왜 오늘은 춤 안 추냐며 괜히 찔러본다. 직관은 사람을 이렇게 바꾼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명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한참 야구에 빠져살 때는 출근할 때부터 유니폼, 머리띠, 응원수건, 응원봉 마지막으로 유광점퍼까지 챙겨가 퇴근 땡 하자마자 야구장으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더운 8월 한여름에 무선 선풍기와 얼음팩까지 싸들고 꼬질꼬질하게 응원한 기억도 난다. 직관을 가면 이기면 좋지만 사실 져도 그리 나쁘지 않다.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고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겹지도 않은지 매년 발걸음이 자꾸만 야구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