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귤껍질 편지
이번 주는 많이 대화하고 들으며 바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는 걸 느꼈어요. 문장들이 자꾸 떠올라서 카톡으로 저에게 보내놓은 메모를 아래 공유합니다.
글쓰기의 매력은, 기억을 섬세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밀도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새로운 관계가 가져온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글쓰기는 삶을 붙잡아두고, 회고하게 하면서 시간의 밀도를 높여준다. 지금 쓴 글은 미래에는 쓰지 못할 글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서툴러도 그때 글을 쓰는 것이 꽤나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지금의 나를 계속 기록해야겠다.
호주 여행을 간 기간 동안의 일은 다른 글에서 풀어보려 해요. 11월 마지막 주는 아래와 같이 보냈어요.
11/24 필라테스, 드라마 '김 부장 이야기'
11/25 97's 모임
11/26 장어덮밥 점심, 망원동 집 보기
11/27 CGV 미디어데이, 공연 '태양의 서커스'
11/28 광명 집 보기
11/29 호두마을 1일 차, 아라리오 갤러리 '운보 김기창' 전시
11/30 호두마을 2일 차, 첼로 공연, '아리' 식사
ch1. 작가들을 위한 공간 '시안'입니다.
시안에 오랜만에 손님이 왔어요. 아트컬렉팅 수업을 들으면서 만난 분들이에요. 엄마는 공간을 직영방식으로 지으면서 가졌던 생각들, 경험들을 나눠 주셨고 아빠는 고기를 구워 주셨어요.
+ 아트컬렉팅 모임 이후 첫 컬렉팅 경험은 아래 글에서 보실 수 있어요!
https://brunch.co.kr/@essayhee/177
손님이 올 때 부모님도 함께 계신 건 처음이었는데요. 따뜻하게 환대해 주셔서 제가 혼자 손님맞이를 할 때 따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가 집을 짓기로 한 이유와 과정을 전달할 때는 그동안 제가 듣고 기록했던 내용인데,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공간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니, 오신 분들이 공간을 더욱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시는 것 같았어요.
가족들의 성실함이 모여 완성된 공간으로 느껴졌다, 는 말이 깊이 남았어요. 안 가본 길이라도, 나에게 주어진 것이니 포기하지 않고 매일을 견뎌내는 것, 그 안의 기쁨과 슬픔을 기꺼이 떠안는 게 이 공간을 만들면서 우리 가족이 가진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한 분은 머물며 글을 쓰고 싶은 공간이라며, 괴산이 예술가들에게 유명해진 것처럼 시안 북스테이와 갤러리 공간이 작가들을 포함해 창작하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마침 글을 쓰는 오늘 롱블랙에서 출판과 스테이를 연계한 마나즈루출판사를 소개했어요. 시안 북스테이에는 귤껍질 출판사라는 간판도 같이 붙어 있는데요. 저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필명으로 출판사를 낼 때 시안 북스테이를 주소로 했어요.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은 마나즈루 출판사처럼, 광덕산의 산줄기를 눈에 가득 담을 수 있는 출판사 겸 스테이로 성장시켜도 재밌을 것 같아요.
환대의 느낌은 저도 받았는데요. 선물로 가져오신 사랑스러운 컵케이크에 초를 꽂아서, 각자의 소원을 빌었어요. 동그란 뒤통수를 가진 눈사람이 가장 귀여웠어요.
ch2.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비밀 아지트 같은.
태양의 서커스를 보고 왔어요. 천막에 들어설 때 비밀스러운 공간에 입장한 느낌이었어요. 왕궁을 연상시키는 구조물과 무대 중앙과 좌우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배우들이 나와서 묘기를 보여줬어요.
마음 졸이게 하는 스릴 가득한 현장을 예상했는데 개구진 왕과 신하들, 이를 지켜보는 꿈 꾸는 듯한 소년, 신비롭고 매혹적인 서커스 단장 쿠자까지 캐릭터들의 상호작용이 한 편의 동화같기도, 어린 소년의 상상의 세계 같기도 했어요.
또 천막에 비친 곡예사의 그림자, 무대를 뛰쳐나와 관객석을 돌아다니는 무용수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나게 했어요. 천막 안 동그란 공간을 모두 사용하는 꿈결 같은 무대였어요.
ch3. 박계장은 집이 필요하다.
최근에 독립을 준비하면서, 집을 알아보고 있어요. 광명, 망원 지역의 매물들을 보러 다녔어요. 갑자기 떨어진 과제에 왠지 어른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부담과 예상치 못한 묘한 기쁨이 함께 왔어요. 자꾸 선택지들이 눈앞에 주어지고, 제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맞는지 고민하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실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즐기고 있기도 해요. 친한 지인분들이 가끔, '걱정이라고 하지만 사실 즐기고 있는 거 다 알아' 라며 정곡을 찔러요.
ch4. 김 부장 아저씨는 왜 그랬을까?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요. 이곳이 안전하다는 착각, 누군가에게 기대어 있는 삶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그게 나를 가두고 혼자 서지 못하게 만든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요.
ch5. 취향과 지혜를 기르고 있어요.
최근에는 취향과 지혜라는 두 가지 단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두 가지가 깊어졌을 때 얻을 수 있는 직관이라는 단어도 종종 떠올려 봤어요.
첼리스트 홍진호 님의 '안부' 공연을 봤어요. 어릴 때 첼로를 배웠는데, 낮은 선율의 음악이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들게 했죠. 경험과 느낌을 악보로 풀어내는 건 어떤 과정일까 상상해 봤어요.
말을 걸듯, 걱정하듯, 슬픈 듯 선율을 따라 감정이 저를 감싸고 가는 것 같았죠. 마음을 언어로 풀어내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 신기했어요. 클래식의 세계를 더 알아보고 싶어 졌어요.
안부라는 단어가, 이렇게 다정하고 아름다운지 몰랐어요. 음악을 들으며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연말에 형식적인 인사말 말고, 상대방이 환대받는 느낌, 위로받는 느낌이 드는 인사를 건네고 싶어 졌어요.
세상의 다양한 면들을 두루 보면서 취향에 깊이를 더하고, 사람들과 책을 통해 지혜를 얻고 싶어요. 그럼 많은 선택지들 앞에서 흔들리고 휘둘리기보다, 내 기준에 따라 설레며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ch6. 은퇴해도 될 것 같은, 다정한 위로 한 그릇
이번 주에는 수프 하나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지만, 머릿속에 고민이 가득했어요. 그런 저에게 언니가 따뜻한 수프를 사줬어요.
양송이 수프를 호호 불어서 입 안 가득 채웠더니,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수프를 사준 언니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힘들었던 날, 이 수프를 먹고 '은퇴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어요. 처음 들어본 표현인데,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어요.
이 순간이 너무 만족스럽고, 다정하고, 그래서 내 불안하고 지친 마음이 앉아서 쉴 자리를 찾은 느낌. 언젠가는 그런 느낌을 주는 요리를 저도 하고 싶어요.
위로받고 싶어서, 며칠 뒤 한 번 더 갔어요. 건강하고 따스하고 먹기 좋게, 속을 편안하게 데워주는 수프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 같아요.
정밀아의 ‘언니’라는 노래가 문득 떠올라 링크를 첨부해 봅니다.
https://youtu.be/91p50rUxWQ4?si=Y2PvRmkBloEATBog
ch7. 진솔하고, 일상적인 한국화의 매력이, 처음 마음에 들어온 날
닭, 개 이런 이름을 짓고, 정말 그 대상을 그렸어요. 심보가 못돼 보이는 닭, 다정하게 서로 기대어 있는 강아지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소박하게 그려냈어요. 너무 일상적인 그림이라, 다가가기 쉽고, 그림들이 보드랍고 섬세하지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후천적으로 청각장애인이 된 운보 김기창 작가는 작가인 아내를 만나 결혼해요. 아내 박래현 작가는 오십이 넘어 예술 유학을 가고, 지금 봐도 세련된 작품들을 남겨요. 있는 그대로 봐주고, 서로의 삶을 지지하는 것, 그런 관계가 저에게도 있기를 바라요.
이번 주에 좋았던 순간들을 남겨봅니다.
엄마가 천안에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모빌이 될 것 같아요.
저도 조랭이떡같은 미니 눈사람을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나눠줘 볼까? 생각했어요.
천안에서 만나, 이틀간 우리 주변을 맴돌았던 고양이예요. 먼저 다가와 다리에 등을 비비고, 쓰다듬어주면 손에 맞춰 머리를 숙였어요. 햇살 아래 잠든 모습이 안온해 보여서, 사진을 남겼어요.
길어지는 회의에, 회사 다이어리에 조용히 슥슥 그렸어요. 연말을 뿌듯함, 다정함, 반짝이고 사랑스러운 것들로 가득 채우고 싶어요.
단풍의 색만큼 예쁜 게 또 있을까요? 빨갛게 타오르는 모습이 아름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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