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_밤에 만나는 여자들
아파트 내 독서 모임 ‘책 봄’의 공식 첫 모임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실명과 서로의 나이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심야에 방문하는 곳은 10동 15층. 모임장 지혜의 집이다.
내년에 쉰을 바라보는 정미는 커뮤니티 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10동에 입대의 회의하기 위해 자주 들른다.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여린 정미는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봉사직을 하고 있는지 신기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다. 누군가의 민원 안건을 가지고 들르는 것이 아닌 책을 들고 방문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10시에 모이기로 했으니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9시 48분, 미리 알려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마침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꼬르륵...’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오늘밤 치맥 파티를 위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배도 고팠다.
[7층. 취소. 15층. 문이 닫힙니다.]
실수로 자신의 층수를 눌렀다가 다시 지혜네 집 층수를 누른다. 6월인데 벌써 밤 기온도 후덥지근하다. 제일 먼 동에서 왔더니 덥다. 대각선 구석 에어컨 바람 나오는 자리에 등을 기대고 척추를 세운다. 팔은 모서리 양갈래로 뻗은 봉에 걸쳤다.
[문이 열립니다.]
15층에 내렸다. 지혜네 현관문이 살짝 열린 채 말발굽이 발을 딛고 있다.
‘이거 소방법 위반인데...’
똑똑. 모기소리로 인사한다.
“지혜님~ 저, 소정미예요. 애기 자요?”
“오셨어요, 정미 언니~? 딱 10분 전에 잠들었어요. 저녁에 키즈카페에서 놀렸으니 몇 시간은 끄떡없을 거예요. 흐흣~”
지혜는 전략적으로 키즈카페에서 아이와 스펙터클한 놀이 활동을 했다. 7살에게도 여전히 키즈카페는 천국이었다.
“어머~ 단지 뷰네요~ 석가산이 여기 높이에선 이렇게 보이는구나~~”
“가까이 가서 내려다봐야 보여요~ 5~6층 집에서 보면 바로 앞에 연못 있는데~”
“어머~ 고층인 게 어디예요~ 아, 29층이니 중층이구나~ 저는 끝동 공사장 뷰예요~우울해-”
“아~ 그래도 완공되면 시티 뷰 이잖아요~”
“참, 지혜님은 개구리 소음 어때요? 거실 창문 열어놓으면 여기서도 시끄러워요?”
“소음이요? 운치 있고 좋은데요?”
“이게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너무 달라서~ 민원 때문에 연못에 약 치게 생겼어요.”
“아이고... 불쌍해라..”
그때 약속이나 한 듯이 모임원들이 몰려 들어왔다.
도영과 은혜가 신기해하며 집을 둘러본다.
“어머~~ 여긴 이렇게 꾸미셨구나~ 이쪽 방은...”
출입금지구역이라고 써 놓는 대신 작은방 문 앞에 큰 화분을 놓아 장식했다.
“아! 거긴 못 치워서 금전수로 막아 놓은 거예요, 하하~ 우리 치킨 식어요, 어서어서 오세요~”
당황하는 지혜의 재치 있는 말에 다 같이 웃는다.
참석자는 7명이다. 자랑스러운 2미터 길이의 테이블이 모임 하기에 딱 알맞다.
“다들 읽고 있는 책 들고 오셨어요?”
“네~”
“그럼 우리 잊기 전에 사진 한번 찍을까요? 아이폰이신 분?”
그들은 각자 책을 테이블 위에 책을 올리고 항공샷을 찍는다. ‘교촌 반반 점보 윙’도 언뜻 책처럼 보인다.
이번에는 각자 책 표지가 보이게 들고 이쪽 끝에서 한번, 저쪽 끝에서 한번 찍는다. 카메라 앞쪽인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얼굴 면적이 늘어났다.
“자, 이제 독서 모임 첫 기념사진을 찍었으니 책은 다시 집어넣어 주세요~”
“책을 도로 집어넣어요~?”
“네~ 오늘은 친해지는 날이에요~ 어서 책 숨겨 주세요~”
모두 기쁜 마음으로 책을 가방에 넣는다.
“독서 모임도 처음이지만 책 다시 집어넣는 모임도 처음이네요~”
자기소개를 한다. 나이와 몇 동에 사는지와, 간단한 인적사항을 얘기한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은 그동안 매운맛이 그리웠다며 매운 양념치킨을 야무지게 뜯고 매콤함에 감탄한다.
“근데 다들 어쩜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세요~? 저는 속도가 그렇게 안 나던데...”
한 달 동안 3분의 2권을 읽은 정미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본다.
정미의 말에 큰 키의 아가씨 오사랑이 허니 치킨을 오물거리다가 맥주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저는 책이 재미있겠다 싶은 것 위주로 읽어서 좀 술술 읽는 것 같아요~ 판타지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거요. 스트레스 풀 땐 술이랑 책이 둘 다 필요해요.”
사랑의 오른쪽에 앉은 은혜는 술을 마시지 않고 탄산수다. 총기 있는 눈빛에 똑 부러지게 생긴 이목구비를 닮아 취향도 자기 계발서다.
“저는 에세이 쪽보다는 자기 계발서인데요, 책을 읽고 나서 구체적인 도움이 되겠다 싶은 책이 가장 먼저 손에 잡히더라고요. 근데 웃긴 게 이 모임 하기 전에는 1년에 두세 권? 그 정도였는데 필사 모임 하니 벌써 한 달도 안 되어서 1권 완독을 했어요. 너무 뿌듯해~. 어찌나 필사들을 많이 하시는지... 저도 모르게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은혜의 말에 독박육아 중인 조서연이 맞장구친다.
“맞아요, 지혜님이 진짜 모임 잘 만들어 주신 게, 노트에 쓸 거리 찾으면서 읽으니까 뭔가 더 쓸거리 없나 매의 눈으로 찾게 되는 것 같고요. 또 미션달성 해야 나에게 주는 선물? 그거 살 수 있으니까 동기 부여도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모임 만들 생각 하셨어요? 대단하신 것 같아요~”
지혜의 눈은 쑥스러움의 쥐구멍을 찾고 있는데 어깨에는 뽕이 들어간다.
“아.. 사실은 저도 다른 독서 모임을 두 번 나가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까 뭔가 긍정에너지도 생기고요. 근데 일하면서 저녁 독박, 주말 독박이긴 해서 자주 나가기가 어렵더라고요. 요기 후문에 선플라워 카페요. 거기 부부가 운영하는 곳인데 가보셨어요? 거기 두 분이 아니었으면 책도 제대로 안 읽었을 거고, 모임을 만들 일은 더더욱 없었을 거 같아요~”
“거기 땅콩크림 라테 저 최애예요! 거기 여자분이 한가할 때 자주 책도 읽고 하던데 지혜님 친하신가 봐요?”
“얼굴을 아는 정도예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가 책을 읽고 모임까지 만들 수 있게 독려해 주셨어요.”
정미는 야무지게 윙을 뜯다가 다시 생각난 듯 말했다.
“근데 책을 좀 읽다 보니까 세상에 읽을 책은 이만~큼 많은데 속도가 너무 안 나더라고요. 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속독법을 배워야 하나 싶더라고요.”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정미의 말을 이어 김민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아요. 막 어떤 사람은 한 페이지를 눈으로 사진 찍듯이 뇌에 찍어서 읽는 초능력도 있지 않아요?”
“저도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빨리 읽으면 그게 다 기억이 날지 의문이에요.”
모임에서 연장자인 윤주희의 말이었다. 최근에 울쎄라 시술을 받은 주희의 피부는 빛이 나고 있었다.
요즘 필사 인증이 부쩍 늘어난 안수진도 입을 열었다.
“저는 볼펜으로 끄적이기는 하는데 예쁘게 쓰지는 못해서 처음에 주눅이 들더라고요. 다들 글씨들이 너무 정갈한 거 아니에요?”
“수진님~? 바로 제-가 있잖아요~?”
악필인 지혜가 자신 있게 말했다.
“지혜님 글씨 보고 '아~ 이 정도면 나도 괜찮겠다~' 하긴 했어요~.”
“와.. 완전 뿌듯..! 저희 남편이 너 악필 유지하라고~~ 그래야 글씨 못 쓰는 사람이 들어와도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수진님이 악필이란 얘긴 아닌 거 아시죠~?”
모두 웃으며 즐겁게 뜯고 마신다.
이번엔 서연이 얘기를 꺼낸다.
“지혜님, 우리 카톡 이름에 나이랑 관심 분야 쓰잖아요~ 근데 저는 그걸 쓰면 왠지 그 분야 책만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전 솔직히 분야 안 가리거든요~”
“반찬처럼 책도 골고루 먹는 게 더 좋죠~. 처음에 서로 정보들도 없고 하니 최소한의 관심사라도 대화명에 적자고 생각한 건데 그걸 적었다고 꼭 그 분야 읽으란 법은 없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지혜의 답변이다.
“와~ 이렇게 야밤에 여자들이 치킨 뿌시면서 책 얘기 하는 거 너무 건전한 거 아니에요? 저, 여기 있는 거 완전 소속감 느껴요~!” 정미가 뿌듯해한다.
정미의 말이 나온 김에 지혜가 생각난 듯이,
“지금 생각해 본 건데요~, 우리요~ 다음에 독서 모임 할 때 '독서법'에 관한 책 하나씩 각자 다른 제목으로 들고 와서 모임 해 보는 건 어때요? 저도 도서관에서 독서법에 대한 책이 몇 권 보이길래 인터넷 서점에 검색해 봤는데 독서법 책 종류가 엄청 많아요! 다 다른 거 들고 와서 책에서 하라는 대로 실천해 보고 모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독서법이요? 책 읽는 방법이 쓰여 있는 책이 그렇게 많아요?” 은혜의 눈이 빛난다.
“네~ 제목만 봐도 흥미진진한 책이 많더라고요~”
모두 동의를 하자 다시 지혜는 말한다.
“좋아요~ 그럼 내일 제가 카톡에 공지할게요~. 각자 고른 책 댓글로 달고, 안 겹치는 제목으로요~”
밤이 무르익었다. 치킨도 맥주도, 샤인머스캣과 참외도 자취를 감추고 이들은 해산했다.
첫 밤모임에 지혜의 아들은 방에서 기절잠을 자 주었다. 식탁을 정리한 후 지혜도 숙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