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_모임을 만들기만 했을 뿐인데-
지혜는 상대방을 알지 못한다.
모르는 사람이 손을 반갑게 흔들며 외친다.
"지혜니임-! 저 주은혜예요~!"
"어머머~! 은혜니임~~ 안녕하세요~!"
아이 픽업 가는 길에 아파트 단지 안에서 너무 뜻밖이라 어쩔 줄을 모르는 지혜의 표정이다. 순식간에 연예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 뒤엔 ‘진아 님’도 지나가다 마주쳤다. 같은 단지에 살면서 이름에‘님’ 자를 붙여가며 첫 대면을 하는 것은 어쩐지 재미있고도 낯간지러운 체험이었다.
모임장인 지혜는 보름 동안의 진도를 체크해 보았다. 이름과 인증 일수를 순서대로 뽑아서 공지했다. 공지사항에 나열된 중간실적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다고 말하는 모임원도 있고, 뿌듯하다고 말하는 모임원도 있었다. 그리고 월 초반에 이틀 연속 인증하고 활동이 없는 한 분이 있었다.
「@안수진/38/자기계발 수진님~ 한 줄만 줍쇼~!」
「┕> 앜ㅋㅋㅋㅋ 저 어떡해요?ㅠㅠㅠ 책 읽기는 읽고 있는데 쓰는 게 잘 안 돼요ㅋㅋ 」
「넵~ 규칙은 필사한 문장 한 줄이랑 자기 생각 2줄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인증 부탁드려요~
수진님, 무슨 책 읽고 있으세요?」
「저 ‘역행자’ 읽고 있어요~」
「좋은 책 읽고 계시는군요~!!」
‘한 줄만 줍쇼~’란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은 수진은 그다음 날부터 부담을 덜어 필사 인증을 자주 하게 되었다.
또다시 보름이 지나고 첫 달의 말일 전이 되었다. 모임의 선순환을 위해 결단이 필요했다.
「이제 우리가 함께한 지 한 달이 되었군요~ 미션 달성하신 분은 월초에 공지 댓글로 달아주셨던 ‘나에게 주는 선물’ 인증사진 올려 주시고요~ 모임은 매월 1일 재시작됩니다. 다음 달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은 인사하신 뒤 나가 주시면 되십니다. 」
나가시라고 쓴 글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쉽게도 저는 육아랑 다음 달부터 급히 육아휴직 조기복직을 해야 해서..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들어올게요~ 좋은 분들과 함께 책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
「아.. 지은님 ㅠㅠ아쉬워요.. 다음에 언제든 다시 뵈어요~」
「지은님 또 볼 수 있길 바랄게요~」
본 적 없는 이들이지만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5월 1일에 또다시 카톡으로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뒤, 올 것이 왔다.
「모임장님! 저희 정모 안 하나요?~」
적극적인 은영의 제안이다.
「맞아요~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얼굴도 서로 모르고~ 우리 한번 모여요~」
도영도 맞장구쳤다.
「좋은 의견 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낮엔 일하고 주말이랑 평일 저녁도 독박육아라 모임을 자유롭게 나가기 어려워서 고민인데요... 호옥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밤 10시.. 이럴 때 모이는 것은 어떨까요? 너무 늦을까요?」
「오~! 너무 좋죠~!! 」
「저도 좋아요~ 우리 치맥 해요~ 」
「저도요~ 근데 아이는 그 시간에 자나요? 저도 아이 재우면 10시나 10시 30분쯤 가능할 것 같아요.」
회원들의 호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지혜는 걱정 반 기대 반이다.
「 아이가 자꾸 놀고 싶어서 요즘 11시 다 되어야 자는데 시간 당겨서 재워 봐야죠~^^ 어떻게든 재우고 10시로 우리 날짜 한번 잡아봐요~」
그렇게 그녀들의 의견을 듣고 나서 아파트너 앱에서도 독서 모임원을 모집하고, ‘우리 정모 안 하느냐’는 말에 밤 10시의 독서 모임이 바로 지혜네 거실에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좀 더 자주 모이자'라는 의견을 듣고 두 달에 한 번 보던 것을 한 달에 한 번으로,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독서 필사 모임'이라는 오픈 채팅방 이름으로 운영하다가 ‘우리 모임 이름 정해요’라는 말이 나와서 투표를 했고 <책 봄>이라는 이름이 뽑혔다.
4월 1일 봄에 시작된 모임이기도 하고 책을 본다는 의미도 있어서 그녀들은 모임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픈 채팅에는 과거 공지글이 사라진다고 일반 톡방으로 이사 가자는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일반 채팅방으로 대이동 했다. 자신의 진짜 프로필 사진으로 대화를 시작한 그녀들은 서로 연락처 교류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필사 인증에 묻혀서 중요 공지나 모임 기록이 휘발되는 것 같다고 해서 비공개로 '네이버 밴드' 개설까지 해서 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모임 때 찍은 사진, 독서 모임 기록, 공지 기록들을 주로 보관하니 히스토리가 쌓여갔다. 기록하는 그녀들에게 소중한 시간들이 기록되면서 더욱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었다.
요즘은 붙잡는 문화가 별로 없다. '갈 사람 안 붙잡고, 올 사람 안 막는'다. 대신 계속 머물 수 있도록 서비스해야 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비단 구독서비스나 무료반품 등의 영역만이 아니다. 사람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여있지 않길 원하면서도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붙들리기를 원한다. 붙들리고 나서 버릴 것인지 취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길 원한다. 타의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보니 자의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과 맞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고 인간관계를 '정리정돈' 하길 원한다.
지혜는 후회했다. 처음에 두세 명이 한두 달 필사 인증을 채우다가 흐지부지 단톡방을 나가도록 그냥 보내준 것을.
떠날 사람을 쿨하게 보내 줘야 남은 사람도 더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을 못 붙인 건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지혜 자신도 누군가가 붙잡아 주고, 제안해 주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해주다 보니 어느새 자신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좋은 습관 만드는 일은 혼자로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일이라서 함께 그 집단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 사람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때 더욱 삶에 탄력을 받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극적인 어느 누군가는 스스로 해 볼 용기가 없어서 도저히 할 엄두가 안 나는 '큰일'도 부탁받으면 해내기도 한다. 지혜가 그랬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주기 위해 부탁이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혼자서는 절대 하지 않았을 '용기를 발휘' 한 것임을 깨닫기도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공헌’에서 오는 충만감과 자아가 성장한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독서 모임장이 줏대 없이 모임원들 하자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의견들이 반영되는 맛에 모임원들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을 이끄는 것도 못 하고, 말도 조리 있게 못 한다고 생각한 지혜에게 진정한 리더라며 추켜세워주는 모임원들도 있었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하는 지혜는 어느새 10명을 이끄는 리더를 하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다양한 연령의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지속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독서 모임을 아끼고 자부심 가지는 모임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함께 성장하는 모습에 지혜는 마냥 뿌듯했다.
‘난 그냥 서너 명이 입장한 카톡 독서 모임을 만들었을 뿐인데 ‘말 잘 들었더니’ 어느새 인원이 10명이 되었다. '책 봄'이라는 모임 이름이 생겼고, 오픈 채팅에서 좀 더 가까운 일반 그룹 채팅으로도 옮겨가게 되었네. 누군가는 하면 좋겠다고 생각만으로 그칠 것을 난 ‘시작’했고 얻어나갔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 진짜였어.'
나중에 '책 봄'은 오프라인 독서 모임도 자주 하게 되고, 네이버 밴드까지 만들게 된다.
지혜는 한 편 소극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는 '줏대'를 지키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임이 자리를 잡았으니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들을 수도 없고, 10명 남짓 되는 모임원들의 참여 가능한 날짜와 시간대를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기로 했다. 매번 투표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모임으로 정한 날은 남편에게 꼭 휴무를 내서 아이를 돌봐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답변을 들었다. 정기모임의 날짜를 정하면 오히려 근무 스케줄 잡기가 더 편하다고 말이다. 지혜는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손이 많이 가고 신경 쓰이는 행위이긴 하지만, '책 봄'이라는 존재가 계속 독서를 해나갈 수 있고, 지혜가 성장하도록 뿌리내릴 토양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