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_독서는 재미지~!
'땡큐'가 오기 전까지의 사랑이의 휴일 기상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그러나 오늘도 사랑이 깬 시간은 7시다.
거실을 지키던 땡큐가 살짝 열어놓은 방문을 코로 밀고 들어온다. 꼬리를 바쁘게 흔들며 얼굴을 핥는다. 시계라고는 핸드폰 시계뿐인 이 집안에서 누구보다 시간 감각이 있는 땡큐다. 땡큐의 기척이 바로 알람시계다.
하얀색 미니종 몰티즈 '땡큐'를 키우면서 사랑의 아침은 더 빨리 찾아오는 것 같다. 사랑은 소위 '개엄마'인 것이다.
거실 구석 배변 패드에 '이쁜 똥'을 눈 땡큐는 '어서 일어나서 나를 칭찬해 주고 저걸 치워달라'는 애교의 꼬리질을 한다. 사랑이 못 본 척을 하자 이번엔 얼굴로 덤벼들듯 다가와서 마구 핥기 공격이다.
"으음~ 땡큐야, 누나 쪼금만 더 자구~ 나가 있어..."
이번에 사랑은 아예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버린다.
애견은 주인의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팔 옆으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드러난 사랑의 얼굴 옆으로 간다. 그리고 귀와 뒷목 사이에 따뜻한 솜뭉치를 기대어 온다. 오늘따라 피곤한 주인의 낌새를 느끼고 체념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땡큐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거실로 간다.
사랑이 실눈을 뜨고 핸드폰을 더듬어 찾는다.
앱으로 자동 급식기 앞에 달린 CCTV를 보니 땡큐가 정자세로 앉아서 사료가 나오는 곳을 응시하고 있다. 신뢰 가득한 눈빛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7시 30분, 사라라라락.
자동 급식기에서 사료가 나온다. 땡큐는 허겁지겁 먹어 삼킨다. 공기반 사료반.
"아잇, 땡큐야~~!!"
사랑이 이불을 던지고 미끄러지듯 뛰어간다.
땡큐가 밥을 너무 급히 먹다가 숨을 너무 많이 들이마셔서 켁켁, 버티고 서서 꺼이꺼이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꼭꼭 씹어 먹어야지~! 급하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
애견을 아기처럼 안아서 등을 쓸어내리니 트림을 '꺼억' 하고는 다시 자동 급식기 쪽으로 황급히 간다.
아쉽게 서성이다가 자기 집에 들어가서 쉰다.
모처럼의 연차다.
원래는 '대자연의 날'일 때나 여행 갈 때 붙여 쓰던 연차인데 오늘은 '그냥' 연차를 냈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요즘은 사는 게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는 남자친구가 그녀를 '과잉보호'했기 때문이다.
날씬하고 긴 다리, 둥근 이마와 쌍꺼풀진 눈, 웃을 때 볼에 패이는 보조개는 뭇 남성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녀에게 밤이든 낮이든 길 가다가 연락처를 물어오는 일은 일상이다.
헤어진 남자친구도 호프집 옆 테이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 때문일까? 불안한 나머지 그녀에게 혼자 있을 틈을 주지 않고 회사에서 집까지 데려다주는 지나친 보호를 했다. 그녀의 치마 길이를 단속했으며 향수도 뿌리지 못하게 했다.
친한 친구나 어머니에게 상담을 해 보아도 나중에 결혼하면 갑갑하게 할 것 같다는 의견이다.
갑갑한 것은 질색이었으므로 헤어지자고 했다. 카카오톡으로 잘못했다는 장문의 문자가 와 있어서 이제 우린 끝났다고 잘 얘기한 것 같은데 10분에 한 번씩 장문의 카톡이 온다. 하단의 [... 전체 보기]를 안 봐도 비디오다. 위에 쓴 글이랑 같은 얘기다. 메시지 차단을 하고 인스타를 정리한다.
오늘 연차를 잡아 놓고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머리도 띵 하고, 목구멍이 타 들어갈 듯 건조하다.
'땡큐'를 산책시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땡큐~! 산~책 갈 거~야?”
귀가 쫑긋 한다.
“산~책~? 그러며언~ 얼굴 털 빗고 가야 해.”
촘촘한 안면빗에 손을 뻗자 뒷걸음질이다. 누런 눈물 자국이 털에 배어나지 않도록 눈물도 닦고 꼼꼼히 털을 빗겨준다. 눈물샘이 터지지 않도록 처음부터 간식을 멀리하고 털을 잘 빗겨주고 (물론 얼굴털 빗겨주는 건 땡큐에게는 공포이지만) 사랑이 각별하게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다.
처음에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랑의 어머니는 분명히,
'집에 개 데리고 오기만 해 봐라, 콱 내쫓을 테니!' 하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그러나 이제 강아지는 이 가족의 중심이 되었다. 행복한 ‘견라밸’을 위해 산책시키기 좋은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낡은 빌라 골목에서 위험한 차와 오토바이를 피해 목줄을 짧게 잡을 적에 비하면 지상에 차 없는 아파트 단지 예쁜 둘레길만 돌아도 1 킬로미터는 되는 곳에서 키우니 땡큐도 즐겁고, 주인 마음도 놓이고 편하다.
사랑의 어머니는 더 이상 결혼하라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사랑은 어머니의 물건 못 버리는 습성에 학을 떼었고, 어머니는 사랑이 나이 30이 넘도록 종종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이 못마땅하다. 두 룸메이트의 화합에 일등공신인 존재가 바로 땡큐다. 그녀의 어머니가 이제는 '네가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땡큐는 여기 놔두고 가야 한다'라고 으름장을 놓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얼굴이 잘생긴 몰티즈는 배변도 잘 가리고 식당에서도 ‘있었는지도 모르게’ 얌전히 케이지에서 잠을 잔다. 사료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알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별식은 상추다.
애견은 3~4개월 때 사회화를 잘 시켜야 한다. 그때 강아지와 사람들을 보고 흥분하지 않도록, 짖지 않도록 교육을 잘했더니 사랑의 어머니는 '이렇게 이쁜 강아지가 세상에 어디 있냐'며 손주 대하듯 예뻐하는 것이다.
사랑이 훈련시키는 중인가 보다. 그녀에 손에는 고작 애견사료 서너 알만 쥐여 있다.
"땡큐~ 앉아, 엎드려~,아유 잘했어~!, 돌아! 손, 저쪽 손, 하이파이브~!"
이젠 꾀가 들어서 사랑의 손에 사료가 들려 있지 않으면 두 동작 이상 해주지 않고 '흐응~'소리를 낸다.
산책 갔을 때 땡큐는 주인과 함께 산책길 주변의 잔디에 코를 박고 풀 냄새, 흙냄새를 흠뻑 맡았다. 집에 와서 발을 꼼꼼히 닦여준 뒤에도 땡큐의 기분이 여전히 좋아 보인다. 의무를 마친 사랑은 배에 굵은 마사지 공을 깔고 엎드려 독서를 시작한다.
사랑의 손에는 정지아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가 들려 있다. 양 팔꿈치를 폭신하고 널따란 베개 위에 얹으니 남은 공간에 땡큐가 똬리를 틀어 사랑의 팔에 턱을 얹는다. 폭신한 베개 위에서 들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자장가였는지 자울자울 졸다가 이내 눈을 감는다.
“큭크크.. 아~~ 이 작가 풍류를 좀 안단 말이야?~”
졸던 땡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땡큐, 미안. 아구구 놀랬어? 누나가 나이 들면 왠지 이 책 쓴 사람처럼 되어 있을 것 같아. 수중에 돈 몇백만 원이 있으면 그걸로 조니워커 블루 몇 병 살 수 있는지부터 계산해 본대잖아~ 블루- 맛있지. 어제는 소주를 먹어서 머리가...”
단잠을 빼앗긴 까만 구슬 눈이 끔뻑거린다. 아마 간식 먹는 꿈이었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더니 짝 잃은 새 양말을 물고 도리질을 한다. 흡사 풍물놀이, 그것도 휘모리장단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은 독서 삼매경이다.
20대 초반에는 자기계발서로 머리를 많이 채웠다. 성공의 공식은 비슷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이 울적할 땐 자기계발서에 아예 손이 안 간다. 똑같은 얘기, 해라는 건 많은데 실천이 잘 안 된다. 이제 에세이나 소설이 좋다.
‘에세이는 일기 아냐? 남의 일기를 왜 읽어?’라고 말했었던 사랑이 이제는 에세이를 통해 진솔하고 다양한 삶을 엿보며 다른 인생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사랑은 책 읽을 때 땡큐에게 말을 건다. 책을 읽고 나서 며칠 안에 읽은 책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면 기억이 오래 남는다고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땡큐뿐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땡큐는 ‘갸웃?’하고 있어도 말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읽은 책의 내용이 정리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독서하면서 땡큐를 상대로 책에 대해 말을 한다. 대화를 가장한 독백이다. 그러고 보면 어디선가 본 자기계발서를 하나는 실천한 셈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습관은 와인과 함께하는 것이다. 식탁 앞에 노란 포인트 등만 따로 켜 두고 앉아서 ‘약간 먼 곳’에 레드 와인을 따라두고 읽는 것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딱 2잔까지다. 그 이상 분위기를 내 보려다가 <오만과 편견>을 피바다로 만든 적이 있었다. 책 읽을 때만은 투명한 모스카토로 주종을 바꾸어보기도 했었는데 그녀가 연출하려는 ‘주(酒) 책’ 분위기가 안 나와서 다시 칠레산 ‘레드 와인 딱 2잔’의 규칙이 생겼다. 그게 그녀의 주책이었다.
다음 독서 모임의 주제는 독서법에 관한 책이다. 사랑에게 책이란 '재미' 그 자체다.
그래서 고른 책은 <이동진 독서법>이다.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라는 부제가 매우 끌렸다. 읽는 내내 자유분방한 느낌으로 편안하게 읽혔다. 답이 없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 이동진이라는 사람을 인터뷰하듯, 또는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듯 공감하며 읽었다.
2만 3천여 권을 저자의 집에 진열했다니 웅장해진다. 다시 그녀가 사는 ‘현실 집’을 둘러보니 300권 이상 들어갈 공간은 없어 보인다. 강요하는 느낌이 없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코드가 그녀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