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_코끼리를 먹는 방법은 한 번에, 한입씩
그런데 이 책은 '한 가지만 하라, 단 한 가지에 집중하라'라고 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좀 들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남자다. 남자가 바깥일을 집중해서 하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림과 양육을 주로 맡는 주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 엄마로서 단 하나를 꼽으라면 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셀프 효도의 시대에 엄마로서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은혜는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은혜의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딸이 태어나면서부터 은혜는 숙면을 반납했다. 비염으로 자주 코가 막히는 아이는 자려고 눕기만 하면 답답해해서 어릴 때부터 네블라이져도 달고 살았다. 지금은 없지만 두 돌 때까지 달걀 알레르기가 있어서 음식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제품을 살 때 뒷면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를 확인하던 은혜였다. 대부분 계란이 함유되어 있거나 난류를 포함한 여러 알레르기 유발물질을 언급하며 같은 시설에서 제조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남편은 조선 남자라 일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몫으로 생각하고 여자는 살림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누나만 4명 있던 집의 막내였던 남편은 다른 것은 양보하더라도 밥은 집밥을 고집했다. 빨래를 개고 청소를 도울지언정 주방일만은 절대 손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태신앙인 주은혜의 어머니는 목사다.
은혜는 성도의 수가 150명 남짓 되는 교회에서 집사이자 피아노반주자였다. 반주를 분담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반주자 역할은 거의 혼자 맡았다. 성도들은 은혜가 반주하면 찬송가를 부를 때 더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학생회에 반주자가 한 명 더 있기는 한데 고 3이라 학생회 예배만 참여했으므로 그녀의 부담이 컸다.
토요일 찬양회와 일요일 시간표대로 있는 예배들, 수요예배마저도 피아노반주자가 필요했다. 물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그녀의 예배드리는 방법이지만 순서를 맞추어 한발 먼저 찬송가, 찬양 악보를 준비하고 있다가 성도들이 사회자의 안내대로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동안에도 때에 맞추어 반주하느라 온전히 편안한 예배를 참석하는 것은 어려웠다. 딸아이가 어디서 교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주부의 일상이 무료해질 때쯤부터 남이 차려주는 밥이 가장 맛있듯, 교회의 피아노반주자로서 역할이 과중해지는 요즘은 그냥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는 예배를 보는 것보다 남들과 같은 의자에 앉아서 순서의 흐름에 맞추어 자신의 목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싶기도 했다.
그녀에게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는 할 일들이 갑자기 쓰나미처럼 느껴질 때 서점에서 손에 집힌 책 <원씽>이었다. 한 가지만 하라는 말로 오해를 했었다.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다양한 목표를 설정해서 에너지를 분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 가지 목표에 집중에서 가장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단 한 가지를 찾으라는 메시지였다.
“옳은 말이야. 근데 그 할 일을 안 하면 누가 하지. 딸은 누가 돌보지? 보이는 일을 안 하면 나만 답답하지.”
여전히 단순함을 실천하는 것은 미제로 남겨두고 은혜가 기억해 두기로 한 것은 ‘습관 들이는 데 걸리는 기간 평균 66일’이라는 점이었다.
'책 봄' 독서모임 온라인 필사로 매일 인증하는 책은 <원씽>이었다. 그리고 다음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 '독서법' 주제에 맞게 고른 책은 최승필의 <공부머리 독서법>이었다.
우선 딸의 ‘공부머리’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은 목차들에 끌렸다. 공부 잘하는 비법은 무엇일까? 은혜 자신이 공부를 잘했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와 딸에게 모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으로 골랐다.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을 심산이었다.
<공부머리 독서법> 최승필 저자는 초등학생 시절 내내 전교 꼴찌를 다투는 지진아였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별생각 없이 펼친 한 권의 책, 위다의 <플랜더스의 개>를 눈물 펑펑 쏟으며 단숨에 읽었다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독서에 눈을 떠서 남은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300권 가까이 읽었고, 6학년 2학기때 국어 과목만은 ‘수’가 찍혀있는 성적표를 처음으로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책은 전반적으로 아이의 읽기 능력 상태를 진단하고 훈련을 통해 재미를 붙이고 언어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대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은혜가 꽂힌 부분은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뇌수술을 세 번 이상 받던 저자가 중학교 3학년 때 거의 600쪽에 달하는 천체물리학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사서 10번 가까이 읽고 나서 수능을 앞둔 4개월 전부터 공부를 시작해 수능 전국 4% 안에 들었다는 부분이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도 병원 치료로 고등학교 때 내신 9등급을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진아가 반복해서 어려운 책을 읽고 단 4개월 만에 전국 4% 안에 들었다는 일은 마법같이 멋진 이야기였다.
책은 책을 쓴 사람을 시공간의 제약 없이 만나는 활동이기도 하다. 은혜는 이 책에서 배운 것으로 재미있게 수준에 맞는 책을 읽어서 읽기 능력을 끌어올리라는 메시지 외에도 저자에게 효험이 좋았던 추천도서에 호기심이 발동하고 동기부여를 얻었다.
은혜의 경험상 어떤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강한 동기가 생기게 하는 것은 여느 서점의 책 광고나 블로그 리뷰 보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어떤 책 한 권을 읽고 생각의 변화나 감정의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고 나면 같은 체험을 하고 싶어서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 혹은 취향 저격의 북튜버가 추천하던 책을 구입했었다. 한 권의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친숙하게 다가오고, 이런 사람에게 이런 생각을 이끌게 했던 책이라면, 특히 종이에 인쇄된 본인의 책에 박제되어 있는 추천서라면 못해도 중간이상은 되겠다는 기대가 있다.
은혜는 그동안 벽돌책이 마땅찮았다.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어서 양적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몇 권 읽었다’라는 생각을 할 때 250쪽짜리도 1권이고 600쪽 짜리도 1권이라면 적은 페이지 수의 책이 덜 부담스러웠다.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서 두꺼운 벽돌책 한 권을 진득하게 물고 늘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책들은 챕터 하나의 글밥이 점점 줄어들고 책의 평균 크기도 작아지고 있으며 두께도 얇아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문장을 독자가 직접 찾기 어려울까 봐 친절하게 다른 색상이나 두꺼운 글씨로 강조해주거나 독자 대신 줄을 쳐 준 채 인쇄되어 나온 책들도 많았다. 모두 한 가지에 진득하게 몰입하기 힘든 현대인의 현주소였다. 두꺼운 책을 읽기 힘들지만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 엄두가 안 나는 책은 66일 동안 읽어보자. <코스모스>를 66일 동안 부분 필사 하면서 읽어보는 거야!”
은혜는 백과사전같이 크고 두꺼운 컬러 책 <코스모스>를 읽기 위해 전용 필사 노트를 한 권 만들었다. 어려운 책이니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무언가 끄적이며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필사 노트로 적합한 것은 잘 펼쳐지고 종이도 매끄러운 미색의 'OXFORD' A5 노트였다.
은혜는 평소에 읽던 책을 읽기 전에 항상 맨 먼저 10분이건 30분이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필사를 하며 읽었다. 그녀에게도 경이로움을 주는 책이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지 않다가 서른이 넘어서부터 뒤늦게 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은혜였다. 과학 시간에는 태양계 그림이나 화석 정도밖에 관심 없었는데 이 책은 인문학까지 느낄 수 있는 감성적인 과학 서적이었다. 우주에서 지구와 인간의 위치를 생각할 때도 너무나 하찮은 미물인데 사람들은 이렇게 인간을 존엄하고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인형 놀이하는 것 같았고, 동시에 은혜가 겪고 있는 고뇌와 고통스러운 일들도 하찮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은 분명히 의미 있고 중요한 존재이다. 인간 아닌 어떤 존재가 도구를 개발하고 주어진 생명을 연장하고 은신처 이상의 건물을 세우고 우주로 떠나서 탐험하고 존재의 근원을 찾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넓은 시공간과 고차원에 대해 인식하게 되자 문제를 바라볼 때 좀 더 여유 있는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초정밀 현미경으로 바라볼 때 물체와 인간의 에너지와 전자라는 입자가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되기까지의 그 신비한 결합의 과학이 책 속에 있었다. 고도의 천체 망원경으로 바라봐야만 알 수 있는 머나먼 별들의 존재들은 그녀에게 생각의 폭과 넓이를 더해 주었다.
무더기로 태어나는 태양 같은 별들, 빛이 도달하는 속도인 120억 광년 떨어진 천체를 관찰하는 그 찰나가 이미 120억 광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모습이라는 나온 부분도 상상하기 어려운 우주의 시공간이었다.
은혜는 원숭이 같은 유인원에서 현재의 인간까지 나열된 변천사 그림의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그녀의 보물 1호인 성경을 믿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조상이라면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공룡과 인간의 조상은 전부 아메바란 얘긴가? 모든 생물이 필요성을 느낀다면 다 인간 같은 뇌를 가져서 우주를 탐험하고 있겠네?'
끝없이 팽창되고 있다는 이 우주의 끝도 그 테두리와 모양을 직접 볼 수 없는 인간이다. 3차원 세상만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 영역대도 볼 수 있는 빛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그림으로 정리되어 나와 있었다. 보지 못하는 차원, 광활한 우주 공간 안에 있는 물질과 미립자까지 포함하는 과학에서 신의 존재는 지동설을 밝혀내기 전에 믿던 천동설처럼 아직 과학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과학의 영역이라고 은혜는 믿는다.
종교는 왜 있는 것일까. 종교라는 신념이 서로 달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원치 않는 죄인이 되고 죽었을까. 우리 눈에 보여서 구분되는 색과 물체의 모양은 실제일까? 천체 과학자들에겐 신앙이 있을까, 없을까. 은혜는 태어나면서부터 모태신앙이었으므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이제야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같다. 조금 더 우주에 관심이 생기고 과학을 배웠을 뿐인데 여러 가지 난해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럽다.
은혜는 교회의 친한 집사님에게 <코스모스> 우주에 관한 책을 읽다가 '주님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라고 했더니 영화를 하나 추천받았다. 스튜어트 하젤딘 감독의 영화 <오두막>을 찾아보았다.
여태 기도할 때 막연히 떠올리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쩔 수 없이 <모세> 영화에서 봤던 시내산의 나무에서 불타는 듯한 빛이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기도할 때 감정 이입이 덜 되는 듯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어린양을 안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는 신이 흑인 여성을 비롯하여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랑의 존재였다. 선악을 구별하여 판사처럼 인간이 보았을 때 결과가 후련해 보이는 모습으로 심판하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표현되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도 찾아봤다. 어렵게 느껴졌을 영화가 <코스모스> 책을 보고 배경 지식을 쌓고 나니 좀 더 알 것 같았다. 시공간을 뒤틀어버리는 중력이라는 것이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중력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주라는 공간과 그 많은 별과 행성이 그들만의 법칙에 따라 궤도를 그리며 존재하는 것은 중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었다. 역시 기독교인인 그녀의 생각으로는 아직 인간이 밝히지 못한 우주의 신비가 더 크니 역시 '우주는 신이 만든 세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평행우주, 다중우주론 등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앎의 영역은 무궁무진하고 오래도록 읽히는 위대한 책들 가운데 은혜의 독서량이란 눈곱만큼도 안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겸손해졌다.
은혜는 애초의 목표인 66일보다 빠른 63일 만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책을 완독 했다. 같은 기간에 다른 책도 4권 읽었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잡고 평소에 절대 손이 가지 않았던 벽돌 책을 완독 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성취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