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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Aug 10. 2023

태풍이 쓸고 간 것들 (1990년대 시골집 흔한 풍경)

가을걷이를 앞두고

※주의: 오늘의 글은 비위가 약하신 분이나 징그러운 것이 싫으신 분, 고양이를 키우시는 분은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1990년대 산골에서 어린이가 바라본 가을 태풍은 공포 그 자체였다.


1. 우선 우리 집은 장판 밑이 시멘트가 아니고 지푸라기를 혼합한 황토였다.


2. 우리 집은 우물도 있었다. 자주 사용하진 않았지만 아빠가 우물공사를 종종 하셨다.


3. 목욕을 할 때에는 부엌 아궁이에 땔감을 넣어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찬물과 바가지로 그때그때 대야에 혼합하여 사용했다.


4. 우리 집은 뒤에 밭과 산이 있고 , 마당이 있고 마당 아래에 냇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집터였다.


5. 밤에 가야 하는 화장실은 큰 플래시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간 뒤 파란색 락카로 뿌려서 '변소'라고 써놓은 별채에 있다. 에티켓을 을 위한 문고리는 없으며, 너무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통나무 발판을 한 발씩 균형 있게 디뎌야 한다. 넘침 방지용 작대기가 뒤편에 꽂혀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천정에 종종 쥐가 무리 지어 지나가고 , 집 담벼락 주변엔 밤마다 짝을 찾는 고양이 울음소리, 새끼고양이와 어미고양이가 대화하듯이 교차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었다.

부엉이 소리까지 합치면 정말 밤이 오싹하다.


동그란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온다.

너희는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하신다.


아직 새시가 없던 때라 창호지를 두 겹 붙여놓은 우리 방 문이 점차 강풍에 덜컹 거린다. 무심코 창호지가 살짝 상처라도 나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 뚫어서 구멍을 확장했다.

겨울에 내복 무릎이 닳아 구멍이 한번 나면 점점 손가락을 넣어 늘릴 때와 비슷한 무의식의 안내이다.


아빠는 양동이('바게쓰'라고 불렀다)를 두 개쯤 가져오더니 안방과 우리 방에 물 샐만한 천정을 살피고 아래에 놔둔다.  


내가 유치원 때만 해도 엄마는 계절에 상관없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셨다.

조금 더 자란 뒤에 비가 왕창 올 때 내 기억에는 세탁기와 우리 키만 한 대형 고무 바스켓에 수돗물을 잔뜩 채우셨다.

" 이틀 동안 이 물로 써야 하니  정말 꼭 필요할 때 아니면 씻지도 마라~"


비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바람소리가 기괴했다. 평소답지 않은 고양이의 찢어지는 도둑고양이 소리는 더 기괴하고 잔인해서 소름이 돋았다.


돌풍이 불어서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이 나서 화장실이 가고 싶었지만 여러모로 생각해도 아침까지 화장실은 꾹 참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을 세게 감았다. 엄마 아빠를 믿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니 비는 어느 정도 그쳤다.

그런데 대청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당 앞에 황토색 바다가 펼쳐진듯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냇가와 마당을 구분 짓는 돌벽이 무너질까 봐 , 우리 마당 자체가 강물에 쓸려갈까 봐 걱정하셨다.


엄마가 심리적 균형을 잃으니 나도 무서워졌다. 집이 떠내려가면 안 되는데, 돼지들이 떠내려 가면 안 되는데..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간, 용케 자기 전부터 화장실을 잘 참았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얼른 '변소'를 들어갔다.

아악!~  아빠~!! ㅠㅠ 여기 좀 와보세요~!

 

변소 안에, 쇠로 만든 쥐덫에 걸린 큰 고양이가 빠져 있었다. ㅠㅠ ㅠㅠ

어제 자기 전에 괴상하고 소름 끼치는 고양이 울음소리의 정체였던 것이다.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모르겠고 일단 크니 엄마고양이일 것 같았다.

새로운 새끼들이 태어난 지 몇 주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너무 불쌍하고 충격적이고 무서웠다.


무서웠다는 것은 어디선가 듣기로  고양이를 해코지하면 고양이의 영혼에게 복수를 당하거나 귀신에 들린다는 얘기가 생각나서였다.


태풍이 휩쓸고 간 것들.


비는 그쳤는데 강물은 어쩐지 점점 저 불어나고 있었다.

냇가가 마당 사이를 이루는 있는 작은 절벽이 잘 버텨줄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내 걱정보다는 집상태는 양호했다. 크게 피해보지 않았다. 기왓장이 3개쯤 마당으로 떨어져 있고 ,  텔레비전이 안 나와서 아빠가 지붕안테나를 다시 손보러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셨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이웃집 논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분명 한두 달 후엔 추수를 할 텐데 어린 내가 딱 봐도 올해 벼농사는 망한 것 같았다.


알곡을 까보니 완전히 여물지는 않아 초록빛이 살짝살짝 보이는 물 먹은 쌀이었다.  

질퍽한 논두렁을 어르신들이 삽으로 퍼내서 물이 빠져나가도록 터냈다. 그러나  물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았다. 미나리밭 같았다.


울상인지 인상인지를 쓰는 동네 아재들을 함께 도와 아빠는,  완전히 물속에 누운  벼들을 힘겹게 일으켜 노끈 같은 것으로 묶었다.  



며칠 뒤, 빗질도 안 하고 묶은 머리처럼 질끈 묶인 벼의  쌀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로 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물은 불어난 강물이 쓸고 가서 덮여 사라졌다. 우물 입구 쪽 시멘트로 덧바른 우물터만 겨우 남았다.  

엄마의 예견대로 이틀 동안 최소한으로 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돗물에서 황색 물이 콸콸 나왔다.

물이 새던 천장은 볼록하게 내려앉았다.


도배를  다시 하게 되었고, 바닥에서도 물기가 스미는지 장판 아래 황토였던 바닥을 시멘트로 바꿔 바르게 되었다. 땔감 대신 연탄을 떼게 되었다.


출렁대며 불어났던 냇가(우리는 '거랑물'이라고 불다)의 물이 원래의 수위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냇가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저 윗물에 있어야 할 어른 손만 한  돌들이 무더기로 밀려 내려왔다.  바위인 것처럼 박혀있던 큰 돌들의 위치도  밀려내려 와서 낯선 풍경이었다.

중간에 물줄기가 흐르도록 더 움푹 펴져 있던 곳들이 크고 작은 자갈들로 평평하게 메워지는 바람에 오히려 물줄기가 길을 잃고 헤매며 자박하게 깔렸다.


마당을 벗어나 냇가를 보며

"며칠 전에는 물이 만큼 왔었는데 그게 다 없어졌네~"

하고 동생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 먼 곳에 뭔가 께름칙한 형체가 레이더에 걸려왔다.

쥐덫에 걸린 고양이가 변사체로 돌에 끼여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수위가 높을 때.. 던져진 것 같다. 물과 함께 쓸려가지 못하고 더 높은 높이의 돌들에 걸쳐있던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지도 못했다. 나는  담이 센 편인데, 아직도 고양이만큼은 조심스럽다.

고양이의 영에게 흠잡히지 않도록 피하게 된다.


태풍이 쓸고 간 것은 논과, 우물과 냇가뿐이 아니었다. 배, 사과밭에서도 다익어가는 열매들이 우두두둑 떨어져 상처 입고 있었다. 농민들은 울상인데 때 이른 까치밥에 태풍을 이겨낸 까치며 , 꿩이며 과수원을 순회했다.



과일이 잘되기 위해 인간의 노력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물도 비료도 , 거름도, 농약도 제때 잘 줘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비바람에 영락없이 떨어지는 과실을 보면 8할은 자연이 하는 것 같다.


봄꽃이 필 때 바람이 매섭지 않아야 표면이 매끄러워지고 , 병충해와 가뭄을 견디고,  장마와 태풍이라는 마지막 관문에도 통과를 해야만 과일가게에서 만나보는 과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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