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_<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밀러/ 곰 출판
MBTI 심화반에서 헤어 나온 독서 모임의 그들은 자연스럽게 주제로 돌아갔고, 발제문 내용에 맞게 돌아가며 답을 했다. 처음엔 오른쪽으로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듯하더니 맞장구를 치며 끼어드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순서가 뒤죽박죽, 내성적인 모임원은 준비해 온 답을 말하지도 못했는데 Feel 받은 순영은 4명의 대답 끝마다 자기 얘기를 하기도 했다. 유독 그런 날이 있다. 모임 시간이 약 2시간이기 때문에 한없이 길어질 순 없었다. 그럴 때마다 모임장은 자연스럽게 다음 분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많이 하는 이분은 오늘따라 신이 난 모양이었다. 해박한 지식 자랑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혜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지난번 모임 모습도 상기되었다. 지혜 자신이 어떻게 했었는지 장면을 곱씹어보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처음 모임에 나온 날 지혜가 엄청 뿌듯한 마음으로 값진 시간을 보냈었다. 그 이유가 바로 하고 싶은 말을 후련하게 다 했고, 그럴 때 경청하고 존중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깨달아졌다.
아마도 이분 또한 모임이 끝난 뒤 지난번의 지혜처럼 발걸음이 가벼울 것이며, 오늘 뜻깊은 토론 시간이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신이 나서 발언하는 사람의 얘기는 모두 주제 안에 있었고, 자신의 보석 같은 깨우침을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이야기라 도움 되는 이야기였다.
마스카라를 올리다가 빠졌는지, 마스카라 액으로 코팅된 굵은 속눈썹이 순영의 다크서클 아래에 착지해 있다.
떼 주고 싶다. 그러나 민망해할까 봐 말을 못 한다. 다크서클에 묻어있는 속눈썹을 다른 사람들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얘기가 너무 흥미진진한 나머지 보이지 않을까, 딴생각이 든다. 지혜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돌고 돌아 초점은 제자리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지나가는 여자의 등에 묻어있는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싶었던 지혜였다.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몰래 떼어 주려다가 여자의 등을 집게손가락으로 찔러버려서 난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떻게 얻어낸 귀한 시간인데, 딴생각하면 안 되는데 눈썹, 머리카락, 눈썹, 머리카락. 자꾸 두 털의 서로 다른 이름과 역할에 대해 상관관계를 파헤치고 싶다. 지혜는 생각을 쫓아내기 위해 목 스트레칭을 좌우로 한 번씩 해 본다.
“자, 그럼 세 번째 질문, '신이 없는 막간극' 챕터에요. 저자의 아버지께서 '인생의 의미는 없는 거라고, 한 마리 개미와 다를 게 없다'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대부분 모임원들은 인생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우주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알고 자만심을 줄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 질문에서는 서로 다르게 기억에 남긴 한두 가지 장면을 이야기했고, 한데 모인 이미지들을 다시 조합해보며 기억은 더욱 풍성하게 머리에 새겨졌다.
토론의 주제는 끈기와 집착의 차이점에 대해, 생명에 대한 존엄성, 분류학이라는 것이 언어적 거세인지 아닌지, 어느 범주에도 완벽히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꽤 심도 있는 지적 대화가 오고 갔다.
마지막 질문으로는 ‘나의 물고기는 무엇인가요?’ 라는 발제문이 날아왔다.
지혜는 이 질문이 무엇보다 어려웠다. 책을 읽기 전에는 '물고기'라는 것이 꿈과 희망을 담은 어떤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코다친 것이다. 장장 이틀을 고민했다.
공통 책이 선정되고 나서 하나씩 생각나는 질문을 카톡방 게시판 댓글로 적고 그것을 모임장이 취합해서 공지한 터였다. 그런데 정작 이 근사한 질문을 댓글로 쓴 사람은 ‘저는 나의 물고기 못 찾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당당함에 지혜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이틀간 머리를 쥐어 싸며 고민한 문제다 보니 댓글 쓴 그 사람의 대답을 가장 기대하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한 사색이었는지를 생각하니 곧 괜찮아졌다.
창현의 대답으로는 “물고기라는 학명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제가 좇고 있는 허상이 뭔지, 그게 성공인지, 부자인지, 실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고, 민서는 “저는 물고기가 ‘포기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부적합’이라는 단어를 버려야 하는 것 같아요. 무엇을 평가하는 잣대요.”라고 말했다. 나령은 “혼돈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라고 짧게 말하기도 했다.
지혜는 이틀 동안 고민해 온 것을 얘기했다.
“저는 맘 편히 살고 싶어서 나와 구분하는 ‘선’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난 그들과 달라. 그들은 나와 완전히 달라’라고 생각했던 것인데요. 흉악한 범죄자는 당연히 감옥에서 사회로 나오면 안 된다는 생각,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편견, 동성애를 인정한다면서도 우리 가족이 그런다면 납득 못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애견의 존재인데요. 동생에겐 ‘가족’인 존재가 저에겐 ‘귀여운 강아지’라는 것, 또 다른 누군가에겐 '한 그릇'이 될 수도 있는 그 동물이 어쩌면 '물고기'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아이가 어릴 때 겪은 일이 떠올랐는데요, 3살짜리 내 사랑스러운 아기에게는 양말이나 다름없는 신발을 신긴 채 지하철 좌석에 앉혔거든요. 그런데 애기 발이 옆에 앉은 50대 아저씨 무릎 옆에 살짝 닿았거든요. 근데 그 아저씨가 무릎으로 3살짜리 애기 다리를 탁! 던지듯 치워 버리는 거예요.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그치만 생각해 보니까 신발이 좌석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것이 남들에게 얼마나 불편한 모습으로 비칠지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저한테는 양말같이 깨끗한 아기 신발인데 남한테는 뭐를 밟았을지 모르는 불결한 신발인 거죠. 그 일 이후부터는 신발을 벗기고 의자에 앉혔어요. 책에서 말하는 ‘물고기’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다가 그때의 일이 떠오르더라고요.”
끄적여 온 노트를 봐 가면서 지혜는 마음껏 말했다. 너무 오래 말하는 것 아닌지 눈치를 보면서도 경청해 주는 그 눈빛들을 보니 말이 술술 나오는 것이었다. 역시 속이 후련하고 뿌듯하다.
독서 모임은 희한하게도 3명이 모이건, 6명이 모이건, 할 말을 다 하고 끝나는 시간은 비슷했다. 평소 약 2시간 모임이 오후 1시쯤 끝난다는데 모든 토론을 다 하고 나니 예상시간보다 5분 일찍 마무리되었다.
시간을 지키는 데에는 진행자의 노력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덜 한 사람의 배려와 희생이 있기도 했다. 아예 책을 몇 장 밖에 못 읽고 참석에 의의를 둔 사람도 오늘 모임에 잘 나온 것 같다며 누구보다 열심히 경청했다. 그리고 책을 거의 못 읽고 참여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 보면 관련된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나게 마련이다. '저는 오늘 들으러 왔어요'라고 말하고 오더라도 어느새 주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
독서 모임의 장점은 이렇게 같은 책을 읽고도 여러 의견이 존재할 수 있고, 그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열린 사고, 이해해 보려는 마음가짐과 존중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 펼쳐보지도 않았을 책들이라도 모임에 나오려면 일단 펼쳐보고, 읽어본다.
반찬을 골고루 먹듯, 자신도 모르는 독서 편식을 줄여나갈 수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이곳에 오면 서점에 꽂혀있는 책들의 절대적인 양을 대할 때보다 더 '읽을 책들이 많다'라는 느낌도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고, 더 많이 분발해야겠다는 마음도 먹게 되었다. ‘책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심으면서 좀 더 뿌듯한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 책을 보게 되는 점도 좋았다고 지혜는 생각했다.
이런 똑똑한 사람들과 같은 공동체에 있다니, 자신을 좀 더 높이 평가해보는 콧대가 생기는 것도 과히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단점이라면 어떻게든 그날까지 읽기 위해 급하게 책을 읽기도 했고, 지정 책만 읽다가는 정말 자신의 상황에 꼭 필요한 책 읽기가 미뤄지기도 했다. 책을 쳐낸다고 해야 할까, 그런 급한 마음으로는 사색의 시간도 없이 쫓기는 심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다 못해 경청에 인색한 사람이 참석할 수도 있고, 신념이 서로 다를 때 용인할 수 없는 의견들이 오고 갈 수도 있다. 주제에 대한 질문 없이 자유롭게 만났다가 독서와는 상관없는 얘기만 잔뜩 늘어놓다 돌아가는 비효율적인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별별 사람이 다 나올 수도 있지만 좋은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모이는 독서 모임 특성상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나올 확률은 낮다.
독서 모임에는 어떤 사람이 나오는 것일까? 자신을 편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한다. 내면에 비밀을 꽁꽁 싸맨 채로는 온전히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독서 모임이라는 곳은 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이야기를 꺼내는 곳이다. 자신의 부족한 성격이나 잘못했던 부분도 쉽게 시인해 보고, 앞으로의 포부도 말하게 된다.
때로는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최근의 가정불화나 고민에 대해 반성하며 털어놓는 용기도 생긴다.
오픈 채팅 자체의 특성처럼 독서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서는 상대의 사생활을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서로 간의 예의를 인식하는 느슨한 유대, 거기에서 오는 편안함이 '나'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혜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어렵게 다시 나온 독서 모임이라 얻어가야 할 것이 많았다. 편안한 음악을 듣는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행진곡을 연주하는 마음으로 목적을 갖고 나온 자리다.
오고 가는 시간까지 4시간을 독서 모임에 썼다. 세 식구가 함께 보낼 귀한 주말 중 일부를 할애해서 나온 자리이기에 대충하고 갈 수가 없어서 성심껏 답변을 준비하고 눈을 빛내가며 모임에서 배움을 얻었다. 책과 관련된 인사이트를 얻고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니 흘러가는 잡담 속에서도 깨달음이 생겼다. 집으로 가는 지혜의 발걸음은 활기찬 행진곡이다.
그녀가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고 마주한 풍경으로는 역시 TV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청포도 알맹이 젤리를 쪼물딱 거리며 만화를 시청하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리모콘으로 TV를 끌까 말까 고민하며 엄마의 표정을 진단한다. 그 옆에는 누운 채 핸드폰으로 스포츠 영상을 보면서 홈런볼을 먹다가 눈이 마주치는 남편의 모습이다.
아이도 예쁘고, 남편도 예쁘다.
비록 3분 남짓이지만 짜증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과 분리되어 온전히 자신의 내면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일어나는 3분의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