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_신도시 워킹맘의 책 못 읽는 천 가지 이유
당연히 자식은 부모가 키우는 것이 맞지만 예전보다 더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시대에서 외벌이 만으로는 빠듯하다. 특히 신도시에 영끌 풀 대출로 입주한 젊은 층의 가정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입주 초창기 부동산중개소가 사라진 자리에 식당이 들어오고 텅텅 빈 상가는 어느새 학원 천국이 되었다. 학원을 안 보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루는 지혜의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씩씩거리며 하원했다.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 지목당하며 “넌 태권도 학원 안 다니니까 계속 흰 띠야!”라는 소리를 듣고 오더니 자기도 태권도 학원을 보내 달라고 졸라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태권도 학원에서 첫 달은 흰 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데 몹시 창피해했다. 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 태권도의 띠 색깔은 권력과 계급의 상징이다. 그들의 계급은 부모가 학원비 납부를 한 횟수와 같다.
태권도의 띠 색상이 포켓몬 띠부씰 개수만큼이나 중요해 보였다. 지혜의 아들은 띠 색깔이 바뀔 때마다 띠를 과시하기 위해 평상복 위에 태권도 띠만 두른 채 3개의 놀이터를 순회했다.
지혜의 주변에서 하나, 둘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아이 친구 엄마들 소식이 들려온다. 그녀들의 저녁은 보통 친정엄마와의 공동육아인 경우가 많았다. 오후 3시 넘어 어린이집 벨을 누르는 사람은 아이의 조부모님이다. 할 수만 있다면 부탁하고 온전한 직장을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에 놓인 지혜에게 8시간 근무는 감히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린이집에 오후 4시까지 보내고도 태권도 학원, 그러고도 돈 벌기 위해 저녁까지 누구에게 맡겨야 한다면 하루에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몇 시간인가? 아이의 유년기를 더 희생시킬 수 없다. 등원 시간 후 출근해서 남들 하원시키는 시간, 늦어도 5시 전으로 퇴근할 수만 있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것이 지혜 주변 엄마들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지혜는 3시에 퇴근하기로 계약했으나 정산하다 보면 보통 3시 반이나 4시쯤에 퇴근했다.
급여 조건과는 상관없이 '일+육아'를 병행할 수 있냐, 없냐의 기준에서 꿈의 근로조건이다.
그녀는 또다시 분주했다. 일은 열심히 하면 할수록 줄어드는 게 아니라 더 늘어나는 것만 같다. 면접 볼 때는 서너 가지만 하면 된다고 해서 아쉬운 대로 그 급여 조건과 합의했는데, 점차 맡겨지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도 일이 많아서 제시간 안에 퇴근 못 하는데 이 근로시간 안에 일을 더 맡을 순 없어요!”라고 상사에게 말하면 일단은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듯하다가 며칠 후 다시 그 일이 돌아오는 패턴이다.
한번 담당자는 영원한 담당자, 갑자기 큰 사고를 쳐서 신뢰를 잃거나 퇴사하기 전까지는 불변의 법칙이다. 이러다 회사 모든 사무 관련 일에 몽땅 담당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 급여를 받고 이런 일까지 도맡다니 옛 시절 다녔던 회사가 얼마나 천국이었던가, 하고 지혜는 생각했다.
쌀국수 전문점 3시간 서빙에서 공장 경리 직종으로, 꿈의 근로시간인 5시간으로 늘어나고 나니 그녀의 여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3시간 동안 서 있는 일보다는 자전거 타고 공장 사무실로 다니는 것이 몸은 덜 힘들었다. 첫 출근 하는 날 자전거로 출근하는 데 편도 55분이나 걸렸던 것이 한 달이 되자 길이 익어서 그런지 40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대신 머릿속은 쉴 틈 없이 일했다.
공장. 생산자.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제품’이라는 실물을 눈앞에 내보이기 위해 가장 힘들게 일하고, 본질에 충실해야 하며 이윤은 가장 적게 남기는 맨 하층계급 중소기업 ‘생산자’.
제조업은 제 살을 깎고 깎아 가격 경쟁률을 갖추어야 하고, 동시에 마진을 내야 존폐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조업에서 회계 업무를 한다는 것은 좀 더 치열하게 원가를 다루어야 하는 일이라 상기업 대비 업무량이 너무나도 달랐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얼마나 편하게 일했는가를 비로소 실감하는 지혜는 화장실도 참아가며 일하는 판국이라 책 읽기는 자연 순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밥줄은 월급이고, 책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8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5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압박감, 능숙해져야 했고 빨라져야 했다.
다급하게 출근했고 다급하게 퇴근해서 태권도 학원으로 데리러 가면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아들에게 핀잔을 듣고, 어서 집에 가자고 하면 도리도리, 친구들이 있는 아파트단지 내 놀이터에 들러야 했다.
6살, 7살의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장 오래 남는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대가 비슷한 아이들끼리 놀이터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지혜는 아들에게 오늘은 놀이터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순간 늘 보던 다른 아이의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인사를 한다. 집에 가면 할 일이 태산이지만 막상 정해놓은 일은 없다. 지혜의 할 일이나 눈이 마주친 사람의 할 일이나 비슷하다. 저녁준비와 집안일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녁밥 준비를 해야 해서 먼저 들어가겠다는 말이 구차하게 느껴져서 도로 집어넣는다.
늘 보던 여러 명의 ‘엄마’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 멀리 떨어진 벤치에서는 무료하게 앉은 아빠도 한 명 보인다. 남자는 핸드폰 보다가 한 번씩 생각난 듯 목을 뽑아 자기 아이도 한번 찾아보곤 한다.
"그럼 딱 30분 만이야!"
"앗 싸~~!!"
아이는 화살같이 날아간다. 지혜도 아이 가방과 지혜 가방을 들고 벤치 한편에 앉는다.
"안녕하세요~ 도훈이 태권도 갔다 오는 길이에요?"
"네~ 민재는 오늘 미술이었던가요?"
침묵이 흐르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요즘 관심사에 대해, 요즘 알아보고 있는 학원에 관한 주제로 담소를 한다.
보호자 상시 대기조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을지, 안전하게, 피해 주지 않고, 눈살 찌푸릴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지 감시한다. 누구 하나 미끄럼틀 지붕 쪽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 아이 엄마는 스프링처럼 일어나서 제지한다. 다른 아이가 따라 올라가기라도 하면 상황이 더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시간 10분임을 알려주고 그 10분이 다하자 지혜는 배에 힘을 주어 아이를 부른다.
"도훈아-, 30분 넘었어- 빨리 가자-!"
"싫어~! 민재 갈 때까지만!"
더 놀고 싶은 아이들은 서로 보증이라도 서 준 듯이 친구 이름을 대고 더 놀겠다고 버티기 돌입이다.
엄마들은 다 함께 일어날 시간을 합의한다.
한 번에 일어나야 놀이터 일정을 비로소 마감할 수 있다.
지혜는 독서 모임에도 두 번 가 봤고 도서관도 다니고, 아들의 손을 잡고 서점도 가 봤었다.
그런데 지금, 지혜는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이 책은 읽어준다. 동화 속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여 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깔깔대고 “더! 더!”를 외친다. 아이는 힘 안 들이고 엄마 앞에 기대앉아서 엄마가 들고 있는 책의 그림을 보는 시간이 그 자체로 힐링이며 귀로 듣는 오락이다.
부모로서 한 아이의 배우가 된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다. 그녀가 악당이나 괴물 목소리를 흉내 낼 때는 좋아 죽겠다는 아들의 표정이다. 아이가 어린 시절 물려받은 전집 동화에서는 기-승-전-잠으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점차 낭독을 요구하는 책의 두께와 글밥이 많아지는 것이 문제였다.
지혜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못 읽는 것이다.
‘엉덩이 탐정’ 시리즈를 모두 읽어줬고, ‘나무집’ 시리즈를 계속해서 읽어주었다. 목은 쉬어가고 저녁 설거지는 식기세척기에 넣지도 못했는데 다음 내용이 함께 궁금하다.
‘요즘 책들은 만화처럼 보이면서도 교훈이 있고 상상력을 키워주는 뭔가가 있어서 참 배울 게 많구나, 이런 책이 있었다면 나도 어릴 적부터 독서에 재미 붙였을 텐데.’
누렇게 바랜 종이에 작은 글씨로 된 어른용 세계명작과 위인전만 있어서 외면했던 어린 시절의 책장을 회상해 보는 것이었다.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씻기고 재울 때 다시 스멀스멀 피어나는 자괴감,
‘책 읽겠다고 그만큼 얘기하더니 책은 무슨 책, 이번 작심은 오래갔구나. 석 달이면 훌륭하다 훌륭해.’
마치 교회를 몇 년 잘 다니다가 안 나가고 2주 되었을 때의 죄책감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책을 읽고 싶지 않아서 안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 거다.
이대로 몇 달 있으면 또 책을 잊고 사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까 봐 그녀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책 읽는 기쁨, 앎에 대한 기쁨, 자아 각성,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는 책 속의 강연, 혹은 상처를 깊이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위로의 글자들.
처음부터 몰랐던 기분이면 모를까, 이 좋은 활동을 끊는 것은 인생을 대충 살아도 상관없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만 같아 그녀는 괴로워했다.
이사 온 후 지혜의 시간을 잡아먹는 활동들은 대강 이러했다.
1. 입주 및 가구 가전 들이기 & 집들이
2. 하자보수 A/S접수 및 수리 시 집 지키기 & 아이 어린이집 적응
3. 주식투자 & 엄마들의 슬기로운 커피 생활 & 놀이터 투어 및 벤치 붙박이
4. 아르바이트 & 독서 & 짧은 동화 읽어주기
5. 좀 더 긴 시간의 일 & 좀 더 긴 시간의 ‘아이 책 읽어주기’.
물론 위 활동의 변천사에 포함되지 않는 ‘집안일’이라는 것은 가장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생색내기가 가장 구차스럽다.
A/S 받을 곳도 많이 남았다.
입주했을 때 제발 천정에 구멍만 나지 말아 달라고 빌던 마음가짐은 변하고 살다 보니 자잘한 하자보수 A/S 할 곳은 점점 늘어만 갔다.
욕실 청소를 하고 나니 물이 배수구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고여서 이틀 만에 물때가 생긴다.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입주 때 시공한 줄눈을 뜯고 타일을 다시 깔고 다시 줄눈 업체를 부른다.
거실 전등을 켰는데 눈이 자꾸 피곤해져서 LED 전등을 보니 미세하게 깜빡거린다. 동영상으로 촬영하니 확연하게 깜빡거린다. A/S 접수한다.
주방 후드에서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가 나는데, 연기 빨아들이는 힘은 약하다.
후드를 '강'으로 설정하고 A4용지를 붙여본다. 안 붙는다. 키친타월 1장을 붙여본다. 안 붙는다. 두루마리 휴지 한 칸을 뜯어서 붙여본다. 6초 버티더니 낙엽처럼 지그재그로 떨어진다. A/S 접수한다.
다용도실 문이 잘 닫히지 않아서 사진까지 첨부한 수리 요청 글을 올리면 1달 뒤 한 기사님이 와서 머리를 긁적거리고 간다. 그리고 2주 후 다른 기사님이 와서 소용없는 시도를 해 본다. ‘그게 참 이상하네요’라던가 ‘이건 불량이 아니에요’ 혹은, ‘이거 좀 애매한데 문틀 뜯고 다시 달 면 그전보다 더 집이 나빠져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1달이 넘어 잊고 살려했더니 다시 일정이 잡히고 건설사복을 입은 찐 고수가 와서 10분 만에 해결해 주고 간다. 접수한 것은 30건인데 한 번에 끝난 적이 거의 20%도 안 된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겠다.’
서둘러 퇴근하고 지혜는 ‘선플라워 카페’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