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남편에게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 그런 순간이었다.
유명식당의 무침회를 사가지고 잠깐 집에 들른 동생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마트에 다녀온다고 하는 게 아닌가
명색은 내일 아침에 먹을 제육볶음용 돼지고기를 사러 간다는 거였다.
성인병이란 병은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허구한 날 고기를 먹으려 하는 것도 못마땅(걱정이 아니라)한데,
장을 봐 온 남편의 손에는 골뱅이통조림과 삶은 우렁이가 들러져 있었다.
동생이 사 온 무침회에는 삶은 오징어, 삶은 우렁이 조금, 미나리, 무, 고추양념소스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이것들을 넓은 스텐 볼에 넣고 같이 버무렸다.
적당한 맵기, 적당한 양념 양으로 빨갛게 된 무침회는 말 그대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남편이 추가로 더 넣으려고 골뱅이와 우렁이를 가지고 온 순간,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기분이 상했고 둘이 냉랭한 분위기에서 TV만 보며 말없이 먹는 도중 나는
'남편 입장에서는 더 푸짐하게 먹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남편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기준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나의 통제 욕구라는 건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특히 밖에서는 안 그런데 가까운 가족에게 함부로 화를 낸다.
누군가는 "분노조절장애"가 아니라 "분노조절 잘해"라고 하던데 내가 그런 모양새다.
통제욕구는 통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어릴 적 나의 엄마는 통제끝판왕이었다.
독재도 그런 독재가 없었다.
언제나 무엇이든 본인 마음대로였다.
본인이 추우면 자고 있는 나에게 내복을 입히고 본인이 배부르면 저녁도 건너뛰자고 한 사람이었다.
난 아무리 더워도 엄마가 춥다 하면 창문도 제대로 못 열었고, 내가 아무리 추워도 엄마가 문을 열어두면 맘대로 닫지도 못한 채 자랐다.
물론 그 속에서 사랑과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나에게 의사를 묻지도 않고 본인이 원하는 것만을 한 게 문제였다.
나는 세모를 원하는데 원하지도 않는 동그라미를 주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통제욕구로 가득 찬 엄마였는데 배우자, 즉 아버지에게는 더하면 더 했지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았다.
그걸 보고 자란 나는 엄마보다 더 강화된 통제 욕구로 남편을 잡고 있다.
엄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고 나서 바로 후회하고, 이제는 하면서도 자각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행동을 하기도 전에 자각하게 될 날이 올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