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잘못을 너무 가볍게 여김으로써 그들을 멸시할 수 있다.
아이들은 보모를 선택하는 문제에서 멸시당할 수 있다. 과거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잘 사는 집에서는 아마 보모가 그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보모를 두는 가정이 있고 우리나라 시스템에는 아이와 놀아주는 선생님을 저렴하게 부를 수 있다. 하지면 여기서 어려운 과제가 발생한다. 교육받은 엄마가 아이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보모가 그렇지 않다면 아이는 낮은 대우를 받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보지 않는가. 어른들이 사실은 아이를 천하게 보거나 낮게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실 앞에서 자녀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자 하는 부모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 보인다.
아이들은 엄마의 최고의 시간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엄마가 가장 깨어있고 활기찬 시간을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아이들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대부분 엄마와 아빠의 가장 활기찬 시간은 일과 일터에서 사용된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피곤에 지친 엄마와 아빠의 시간과 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떼를 쓰고 슬퍼하고 더 많이 누릴 수 없음을 괴로워한다.
거친 보모의 태도는 아이들에게 오랜 상처를 남긴다. 특별히 도덕적 관념이 생기는 어린아이 시기에 잘못된 도덕 관념이 생길 수 있다. 이를 테면, 보모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예쁘게 행동하면 엄마에게 안 이를거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생각 속에는 엄마에게 숨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하늘 같은 존재이다. 그런 아이가 부모에게 숨길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쁜 행동과 말을 하고 숨기는 걸 쉽게 하게 될 거다. 아이들은 이렇게 좋은 도덕적 개념보다 나쁜 도덕적 개념을 더 빨리 습득하게 된다.
아이들의 잘못을 가볍게 여김으로서 그들을 멸시할 수 있다. 멸시한다는 건 아이들을 낮게 보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나쁜 행동을 하더라도 그들을 낮게 여김으로서 그냥 놔두는 태도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한살 짜리 아이는 말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부모의 말을 알아듣고 나쁜 것과 옳은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지금 두 살 안된 막내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는 나의 생각보다 언니들과의 경쟁 관계 그리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걸 나는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아이를 보면서 부모가 "너무 어리니까 그냥 놔주지."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 또한 멸시하는 태도이다. 아이를 온전한 인격체로 보는 태도는 나이의 어린 것 혹은 말을 못하는 것과 관계없이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으면 옳고 그름에 대해서 분명히 대화하는 태도를 말한다. 아이가 이빨을 닦기 싫어하여서 투정을 부리면, "그럴 나이지.." 하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에게 이빨을 왜 닦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태도로 닦아야 하는지 차분하고 엄중하게 대화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아이가 나쁜 행동과 말을 어리다고 습관적으로 하는 걸 내버려둔다면 이것이 아이를 낮게 보는 멸시하는 태도이다. 아이는 서서히 나쁜 행동과 말을 습관화하게 되고 성장하면서 그걸 고치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되고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된다. 아주 어려서부터 아이는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지를 차근차근 배워야 한다. 바른 태도와 행동을 가르치는 일은 아이에게 온전하게 행동하는 게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는 훌륭한 부모의 태도이다.
멸시하다는 사전전 의미는 '가치를 낮게 평가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미지로 그려보면 누군가를 깔보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요즘의 교육 방법론을 보면 아이들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 나머지 할 수 있는 것까지 부모가 해주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도덕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부모의 적절한 법칙만 적용할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성장을 할 수 있다.
샬롯 메이슨이 책을 썼던 시절은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때라 지배계층을 위한 노예 보모의 역할이 당연시되었다. 하여 이 질문은 오늘날과 적합하지 않다. 좀 더 현대적으로 접근을 하자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같은 보육/교육기관의 선생님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관련 글들을 쓰면서 해당 매거진의 전반부에서 말했 듯이 이런 기관들의 교육 시스템은 정교한 방임과 획일적인 놀이로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 할 아이의 가치 평가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부모가 현대사회에서 보모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보육/교육기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선택하는 것을 중요한 것 같다. 특별히 가정 내에 확실한 가정교육 철학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으면 그에 맞는 기관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하지만 부모의 가치관과 맞는 기관을 선택하려면 공립 기관이 아닌 사립 기관을 선택해야 할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기관에서 받는 교육 외에 부모가 채워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심도있게 고민해봐야 한다.
일단 교육/보육기관에서 정교한 방임을 받고 나서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부모를 괴롭게 하기도 한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부리거나 토라지는 행위들로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그런 행동들이 가정에서 용인되지 못함을 분명히 알려줌으로써 아이들이 멸시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부모도 아이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가볍게 여김으로 멸시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가정 안에 들어오면 당연히 따라야 할 법칙에 대해서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줘야 하고 아이들이 기관에서 했던 놀이들 이외에 부족한 부분들을 양질의 활동들로 - 예를 들면 자연을 탐구하고 그림을 그려본다거나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는것들 - 채워져야 부모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