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쉬어갈 때도 있는 거잖아요
여행 다섯째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정말 감기로 죽을 것 같더니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해졌어요. 아직 다 낫진 않았지만 무거웠던 몸도 가볍고, 콧물도 덜하더라고요. 거실로 나와보니 지노그림 작가님은 벌써 일어나 개별 업무를 보고 있더라고요. (역시 못말립니다...ㅎㅎ)
어제는 제가 아파서 지금사진 작가님과 지노그림 작가님 두 분만 야경을 보러 나갔다 오시고, 저녁도 해주시고, 이래저래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미안한 마음에 과일을 깍아보았습니다. 커피도 타고요. 시장에서 산 오렌지는 너무 맛있었어요. 오늘은 조금 늦게 나가기로 해서 아침을 가볍게 먹고 난 뒤에 수다도 떨고, 천천히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야경을 보러 다녀온 지금사진 작가님과 지노그림 작가님께서 자그레브의 중요한 곳이 전부 공사중이여서 볼 것이 별로 없다고, 굉장히 심심한 동네라고 하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면서도 중요한 곳은 한 시간이면 다 볼 수 있으니 오늘은 천천히 쉬면서 다니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잔뜩 기대를 했는데 처참히 기대를 무너지게 하는 두 분 ㅎㅎ
숙소에서 나오면 바로 트램이 다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이번 여행에서 제일 잘한 일은 아마도 좋은 위치에 컨디션이 좋은 숙소를 잘 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이긴 하지만 인구가 많지 않고, 관광객이 많습니다. 부다페스트 보다는 조금 더 조용하고 차분하게 느껴졌어요.
자그레브의 광장입니다. 부다페스트와 달리 건물에 색이 입혀져 있어 조금 더 밝은 느낌이 들죠. 이번에 여행하면서 동양인이나 한국인을 잘 보지 못했는데, 자그레브에서는 패키지 관광을 온 한국분들도 만나고, 상점의 주인 분도 한국분이 계셨어요. 반갑기도 했지만 저는 한국 사람이 없는 곳이 더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아쉽다고 해야할까... ㅎㅎㅎ
자그레브의 돌라츠시장이에요.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열린다고 해서 얼른 구경하러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상인분들이 훨씬 적게 나와있었어요. 빈 자리가 많아서 아쉬웠지만 꽃과 과일, 채소들을 주로 팔길래 열심히 돌아보았습니다.
저희가 이미 장봐둔 게 많아서 숙소에 먹을 음식이 차고 넘치는 중이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먹을 것은 미리 사둔 것을 다 먹을 때까지 사지 않기로 약속을 했는데... 우리에겐 지름신이 있나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사고 싶은 것들을 또 사고 있더라고요. ㅎㅎㅎ 결국 감자, 양파, 호박을 또 사고야 말았어요.
시장을 둘러보고 성당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이리쉬 맥주집이 있었습니다. 우리 두 작가님들이 기네스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아쉬워하셔서 두 분은 가볍게 기네스 한잔씩, 저는 마키아또를 한잔 마시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어요. 사실 이 시간에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도록 행복했습니다.ㅎㅎ
자그레브의 랜드마크인 성당을 멀리서 보았어요. 그러나 여기도 공사중... 자그레브의 유적지 곳곳이 공사중이라 혹시 지금 오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올해 말까지 공사를 한다고 하는데 제대로 볼 수 있는 건물이 많지 않습니다.ㅠㅠ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해서 날씨도 매우 우중충합니다. 참고로 어제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계속해서 있었는데 실제로 비는 오지 않았어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저와 지금사진 작가님은 날씨요정입니다. 태풍이 온다고 해도 저희가 여행가면 비가 안오거든요. 태풍도 피해가고요. 그런데 지노그림 작가님은 날씨 악마입니다. 어딜가나 좋은 날에도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어요.ㅎㅎ 날씨요정 두명과 날씨악마 한명이 싸우다 보니 비가 올락말락하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느라 힘든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은 제가 자그레브에서 가장 가고 싶어했던 실연박물관, 깨진 관계에 대한 박물관입니다. 저는 이 박물관이 깨진 관계나 실연에 대해서 어떤 인사이트를 주는 줄 알고 작가님들께 가자고 했던 것인데요. 막상 입장료를 주고 들어가보니 실연 당하거나 깨진 관계에 대한 물건들과 사연을 전시해 놓은 곳이었어요.
물건도 사연도 가벼운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떤 인사이트가 있지 않아서 그것이 아쉬웠습니다. 막연하게 어떤 사람과의 깨진 추억과 물건을 전시해 놓은 것이 전부더라고요. 입장료가 싼 편도 아니었는데 조금 실망하긴 했어요. 제가 가자고 했던 곳이라 함께 간 작가님들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ㅠㅠ
실연박물관에서 나와 옆길로 내려오면 이렇게 자그레브의 랜드마크인 성당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인들이 사랑이 영원히 풀리지 않게 해달라고 걸어둔 자물쇠들도 볼 수 있어요. 이 자물쇠를 보고 여기가 남산일까? 하는 착각을 잠시 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사랑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것 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내려와서 먹은 점심. 오늘은 늦게 나왔기때문에 점심도 약간 늦게 먹었어요. 햄버거와 굴라쉬, 피칸테피자를 시켜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음식, 원래 이렇게 짜나요? 평소에도 조금 짜게 먹는 편인 제가 음식이 짜다고 할 정도면 어떤 정도인지 아시겠죠? ㅎㅎ 어쩔 수 없이 맥주와 음료를 곁들여 먹을 수 밖에 없는 구조... (음식을 더 팔기 위한 상술인 것인가...ㅋㅋ)
점심을 먹고 상점에 들러 자그레브에서 유명하다는 프로폴리스와 잼을 사고,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갑자기 많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죠. 카페에 있다가 급 피곤해진 저희는 숙소에 들어가 쉬다가 저녁을 먹고 오늘은 조금 느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자고 마음을 맞추었죠.
이제 여행의 1/3도 채 오지 않았는데 벌써 지칠 수는 없으니까요. 여행을 하면서 체력관리, 컨디션관리를 잘 하는 것도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더라고요.ㅎㅎ 그래서 저녁을 만들어 먹기 위한 나머지 재료를 마켓에서 사고, 숙소로 빠르게 들어왔습니다. 우리 왜... 안해먹기로 해놓고 자꾸 힘들게 해먹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ㅎㅎ 왜 때문일까요..ㅋㅋㅋ
이것은 지금사진 작가님께서 만들어주신 매생이누룽지리조또입니다. 크로아티아에서 이런 쌀을 먹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죠. 담백하고 너무 맛있어서 한그릇을 뚝딱 다 비우고 감기약을 털어 넣었습니다. 내일은 많이 걸어야 하는 일정이라 얼른 말끔하게 나아야 하기 때문이에요.ㅎㅎ 저녁을 먹고 난 뒤 저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파에 널부러져 각자만의 시간을 보냈죠. 이제 한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해도 불편하지 않고, 눈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친해진 것 같아요. ㅎㅎ
이것은 지금사진 작가님께서 감자를 삶고 으깨어 그 안에 모짜렐라 치즈와 옥수수콘을 넣고 만들어주신 감자전입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막걸리까지! 비 오는 날 해외에서 먹은 환상의 음식이었죠. 이건 아마 두고두고 오래 생각 날 것 같아요.ㅎㅎ
막걸리를 마시며 짐빠 자전거에 이어 물고기 잡는 어항이야기를 한참 하고ㅎㅎ (물고기 키우는 어항 말고 물고기 잡는 어항이 있어요! 모르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새참 이야기도 하고, 어릴 적 어른들이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하면 주전자를 들고 가 막걸리를 받아 오는 길에 반은 먹고 반은 물을 부어 가져다 주었다는 작가님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이렇게 자그레브의 밤은 깊어져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