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이야기
‘댕그랑’ 문에 걸려있는 풍경종이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내부에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풍경종의 청아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내부로 들어왔다. 벽면에는 아기자기한 다양한 물건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줄을 서서 구경할 만큼 인기가 있는 듯했다. 빈틈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눈에 익는 장소가 나왔는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간다.
“사장님”
기다란 바 안쪽에 커피를 내리며 앞에 앉은 고객과 대화를 나누던 서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많이 본 얼굴과 목소리.
“어.. 학생은!”
어깨에 둘러맨 자신만 한 기타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악보를 보고는 음악을 하고 싶어 했던 그 학생임을 바로 알아챘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에 활짝 웃고 있던 학생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저 오디션 합격했어요”
수줍은 미소와 함께 놀랄만한 소식을 전했다. 그토록 바라던 하고 싶은 일을 이루고 찾아온 학생.
서리는 문득 학생의 수피가 소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 학생의 꿈에 영혼은 분명 소멸했다. 그럼에도 꿈에 도전하고 이루어냈다는 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 말을 꺼냈다.
“정말 축하해요. 다행이네요. 꿈을 잃지 않고 도전해왔었군요.”
수피의 소멸에는 여전히 의문이 있었지만 축하만큼은 진심이었다.
“사실 여기 카페가 갑자기 휴업을 한다고 해서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그.. 그건 정말 미안해요. 말없이 일이 생기는 바람에..”
미안함에 머뭇거리는 서리를 보고 학생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이 그러셨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스스로에게 큰 힘이 되었어요. 카페 휴업.. 사장님도 꿈을 찾으러 잠시 다녀오신 거잖아요. 그렇죠?”
뜻밖의 말에 서리는 흠칫 놀랐다. 서리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학생의 말대로 서리는 휴업을 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잊어왔던 해야 하는 일들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만난 것이 수피였고 서리는 자신의 꿈을 이세계를 통해 직시했다. 그리고 다시 카페를 영업하기 시작했다.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어떻게 알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원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카페 사장을 믿어줘서 그리고 스스로를 믿어줘서.”
서리는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 하나를 꺼냈다. 학생을 향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전해줬다.
“이게 뭐예요?”
“검은 끈”
“검은.. 끈?”
작은 양갈래로 갈라진 검은 끈이 학생의 손에 고스란히 올려져 있었다. 액세서리처럼 착용할 수 있도록 체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구경하던 학생에게 서리는 끈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끈이 학생에게 길을 알려줄 거예요. 우연히 이 카페에 왔던 것처럼요”
서리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학생은 자연스럽게 시선이 문쪽을 향했고 아까 전 청아한 소리를 내며 울리던 풍경종에 달려있는 검은 끈을 볼 수 있었다. 학생이 받은 검은 끈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제가 이 카페에 온건 운명 같은 우연이였네요”
“이제 자주 와서 커피 마시고 가요. 할 얘기가 참 많아요”
서리는 애틋한 눈으로 학생을 바라보며 애정했다. 학생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카페를 나섰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학생의 기타 가방에는 아까 받은 검은 끈이 체인을 통해 채워져 있었다. 그때 서리는 깨달았다.
학생의 수피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 꿈에 도달하여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 낸 것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수 없이 열리고 닫히던 문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종소리를 울렸다.
‘후’ 서리는 종일 쌓여있던 한숨을 한꺼번에 내뱉으며 텅 빈 매장을 둘러봤다. 꿈을 찾는 사람들과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그리고 꿈을 찾지 못한 사람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다녀간다. 그들의 육체는 잠시 머물렀다 떠났지만 꿈의 영혼은 아직도 서리눈에 선하게 남아있었다.
이제는 수피를 보고 만질 수는 없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인해 어딘가에 손님들의 수피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다녀간 이 공간에는 따듯함이 가득했다. 고되고 힘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 알차게 보낸 스스로에게 대견함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서있던 서리를 향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신기해. 서리 너의 이야기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바 안쪽 창고에 커튼을 가르며 나온 사람은 동명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와 눈 사이에 걸쳐진 안경은 꽤 오랜 시간 안쪽 창고에서 시간을 보낸 듯싶었다. 그런 동명의 등장에 서리는 상념에서 깨어나 부드럽고 애틋한 미소로 동명을 바라봤다.
“투명했던 내 이야기에 선을 그려넣어 준 게 너야”
“서리 너와 만나지 않았으면 그 선을 그리지도 못했을 거야.”
“우리 서로 칭찬해 주기 게임하는 거야?”
서리와 동명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다.
꿈을 좇는 존재임과 동시에 그 꿈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도왔다. 그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고 있기에 그 둘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실소하며 웃기 시작한 서리를 보고 동명 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삼스럽지만 같이 일 해보자는 제안 고민 없이 받아줘서 고마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뒤로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동명에게 말했다. 그런 서리의 모습을 보고 동명도 잠시 차분해졌다.
“그 제안이 없었으면 나는 이 이야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거잖아. 내가 고마워해야지”
자연스러운 칭찬릴레이가 다시 또 이어지는 듯싶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 사이로 서리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머뭇거렸다. 동명은 그런 서리의 눈빛을 알아채고 눈썹을 위로 올리며 궁금해했다.
“수피.. 네 덕에 만날 수 있었어”
“또 그 얘기야?”
동명은 어딘가 모를 아쉬움이 가슴을 메웠다. 기대하던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새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서리는 동명에게 자주 수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여행을 떠나온 섬에서 동명을 만났고 동명을 통해 수피가 존재하는 이세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진지해지는 서리를 두고 계속해서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동명은 서리의 말을 들어주며 가볍게 공감해 줬다.
“맞지, 내 덕이지 나 아니었으면 수피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동명은 서리가 망상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피라는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존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고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서리의 따듯한 마음만큼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동명 또한 꿈을 찾게 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야. 넌 사실 믿지 않고 있잖아. 수피가 실재한다는 걸”
서운함이 묻어난 말은 아니었다.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대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지 서리 스스로 내면에는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서리는 자신이 경험한 그 기적 같은 일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동명과 섬에서 만난 일까지도. 하지만 동명은 섬에서의 기억은 모두 잊은 듯했다. 그때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서부터 그 간의 경험들이 현실이 아닌 상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스스로를 의심했다. 착각에 불가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서리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더 이상 수피가 실재한다는 것은 서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게 수피가 존재한다는 증거니까.
서리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동명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너와 내가 그리고 여기 오는 사람들 모두가 하고 싶을 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거야”
어두워진 하늘 덕에 카페 내부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꿈으로 가득 차있었다.
…
‘댕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