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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필연적으로 외롭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by 하난

한 소년이 살았다. 흑사병이 도는 시대였다. 꺼멓게 말라붙어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 죽어가는 이들 속에 소년의 엄마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리는 엄마. 소년의 아빠는 엄마를 죽였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은 엄마를 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소년은 그렇게 불에 탄 엄마의 시신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몸에 미처 여인의 몸을 다 올리지 못하고, 바닥에 끌리는 엄마를 치켜들며 돌아왔다. 엄마에 대한 애정은, 그러나 비극적으로 되돌아왔다. 소년의 엄마를 목격한 시녀는 마을에 마녀가 있다고 떠들어댔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마녀로 만들었다. 너무나 쉬운 과정이었다. 마녀가 된 소년의 집에 불이 질러지고,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을 구하다 세상을 떠나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도 쉬웠다. 소년은 그후 더욱 더 생명에 몰입했다. 생명을 치유하는 일, 그리고 그를 넘어 생명을 창조하는 일까지. 이건, 그렇게 생명을 창조하게 된, 생명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소년,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원작 소설과 사뭇 다르다. 이 두 작품에 같은 제목이 붙어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내용도, 인물의 특성도, 전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불우한 유년기를 겪은 그는 프랑스 전쟁 중 시체를 활용해 군인을 만들려 한다. 뮤지컬은 빅터에게 영감을 준 논문의 저자, 앙리를 만나며 시작된다. 빅터는 적군을 치료하다 간첩죄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앙리를 구해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연구에 일조할 것을 부탁한다. 이후 종전으로 연구가 종료되었음에도 둘은 개인적인 연구를 이어간다. 빅터는 영웅전쟁이 되어 고향으로 귀환하게 되고, 앙리는 그와 함께 한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런데 세상은 빅터의 안정을 용납하지 않는 걸까. 모종의 사건으로 빅터는 사람을 살해한다. 앙리는 그를 감싸다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앙리는 빅터에게 자신들의 꿈을 이어주길,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연구를 해주길 소망하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빅터는 앙리와의 약속을 기억하며 홀로 연구를 이어간다. 앙리의 시신으로. 연구는 성공한다. 기억이 없는 채로, 짐승과 유사한 모습이 된 앙리가 깨어나 움직인다. 그러나 빅터에게 그건 앙리도, 인간도 아니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람을 공격하는 앙리의 모습을 한 그것에 절망하며 빅터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의 숨을 거두려 한다. 하지만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던 그것은 도망하고, 3년이 흘러,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나 빅터의 주위인물들을 살해한다. 이야기는, 빅터가 그것을 죽임으로써 막을 내린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마녀사냥은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는가 등 프랑켄슈타인은 많은 곳에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른 것보다 '친구'에 대해서 논해보고 싶다. 앙리는 처음 빅터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 연구의 비윤리성을 들어 거부한다. 그러나 시신 연구를 바탕으로 고통뿐인 세상에 희망을 선사하겠다는 빅터의 신념에 감회되어 빅터와 함께하게 되고, 이후 서툴고 여린 빅터를 보며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앙리는, 빅터의 꿈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설령 그 자신이 죽더라도, 꿈으로 네게 남아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시신 연구'라는 그 이름의 무게로 인해 모두에게서 '소름끼치는 인간', '멀리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 빅터에게 그건 최초의 이해이자 긍정이었다. 앙리의 빅터에 대한 올곧은 믿음과 애정이, 부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맑게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지고지순하게 타인을 믿을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믿음을, 저런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강렬히 열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렬함이 있었기에, 마지막 장면은 더 고통스러웠다. 빅터가 만든 '그것'은 계속해서 자신을 앙리라 부르는 것을 혐오한다. 자신은 다른 존재임을 선언하며 분노한다. 빅터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잃고서야 자신이 만든 것은 앙리가 아니라 인정하고 그를 제 손으로 살해한다. 그런데, 그것이 죽기 직전, 그러는 게 아닌가. "빅터, 내 친구 빅터."라고. 그것은 끝까지 빅터를 옭아매었다. 그것은 앙리로 죽음으로써 빅터로부터 유일한 이해자를 빼앗아갔다. 작중 그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고, 특히나 저의 창조주인 빅터가 자신을 알아주길 원한다. 그러지 못해 생겨난 지독한 외로움이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자, 그것이 빅터에게 돌려주고픈 복수였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빅터에게 완벽한 복수를 했다. 그의 유일한 이해자를 자신의 손으로 없애게 했으니.

프랑켄슈타인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사랑받았고, 외로웠다. 친구를 만났고, 그로 인해 조금씩 메꾸어졌다. 자신을 닮은 생명체를 만들었고, 하나둘 잃어갔다. 너무 많은 걸 잃고나서야 자신이 사랑받았음을 알았다. 빅터는 젊지만, 마지막 순간의 빅터는 노년기의 그것이었다. 이해자를, 기억공유자를 잃고, 외로움에 가득 찬.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어린시절 부모를 여읜 빅터가 그랬고, 집사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았던 빅터가 그랬으며, 모두를 잃은 빅터가 그랬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식으로 삶을 담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빅터와 그것의 관계를 부모 관계로 볼 수 있다. 세상에게서 핍박받던 빅터는 저와 똑닮은 꼴의 생명을 만들고, 가장 이해받길 바랐으면서 단 한번도 제대로 그것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게 꼭 불행의 되물림 같아 슬펐다. 불행했던 이들은 끝내 수용되지도, 행복해지지도 못한다는 것 같아 억울했다. 동시에 부모를 조금더 이해하게 되었다. 빅터도, 앙리도 그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버둥쳤을 뿐이라는 걸 아니까.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 이들의 행위가 모여 의도되지 않은 거대한 비극을 초래했음을 봤으니까. 삶이 그와 닮아있음을 알아서, 그래서, 나의 부모도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 사람들이라는 걸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이래저래 많은 말을 했지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한마디로 말해 재밌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출과 가창력, 화려한 춤과 예상불허의 스토리로 관중을 홀린다. 그 시대의 웹소설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켄슈타인'은 각색을 통해 확실하게 이 시대의 웹소설이 되었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입이 달싹이고 몸이 움찔거렸다. 나도 동참하고 싶다, 이야기에 개입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서점에서 대본집을 살펴봤다. 꼭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혼자 연극을 해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여 욕구'는 이야기의 정점에 있는 욕구라 믿는다. 무수한 오타쿠들이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면 곧잘 2차 창작을 하는 까닭이 그것이라 믿는다. '프랑켄슈타인'은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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