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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람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by 하난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 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작별하지 않는다 중-


내 엄마는 여린 사람이다. 곧잘 다른 이의 말에 현혹되고, 타인으로 말미암아 웃고 우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늘 우리에게 미안해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엄마를 퍽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좋아한다. 그런데 그렇기에 엄마가 미웠다. 그 고운 사람이 사회로부터 상처받고, 가정으로부터 상처받는 것이, 그 슬픔을 풀 곳이 없어 못내 자식들에게 곪은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참 미웠다. 그녀의 고통이 미웠고, 그녀의 미성숙함이 미웠다.


엄마는 엄마이길 바랐던 적이 있다. 늘 나를 포용해주는 거대한 어른이길 소망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 안의 어린아이가 보였다.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여전히 사랑받고 싶고 어리광 부리고 싶어하는 아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내 안에서 사람이 되어갔다.


그녀는 5남 2녀의 막내로, 가장 큰 오빠와는 20살 터울이 나는 막둥이다. 여러 부모를 둔 채 성인이 된 그녀는 24살의 어린 나이에 3살 터울의 남자와 결혼했다. 과묵하고 몸이 좋은, 은근히 감성적인데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두 사람은 결혼 직후 아이를 낳았다. 여리고 작은, 머리가 세모 모양인, 약간은 외계인 같은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몸이 약해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를 걱정시키곤 했다.


이어 4년 뒤, 마찬가지로 신생아 치고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를 낳았다. 오빠와 달리 튼튼하고 먹성이 좋은 아이였다. 아이들과 남편은 특별히 잘 나지도, 모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었고, 여느 사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마음 같지 않은 직장생활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고, 갑작스런 가족들의 부고로 눈물 흘리기도 했다. 자식들의 사춘기,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느 사람들처럼 그곳에 ‘엄마’는 있을지언정, 사람 ‘김은정’은 없었다. 자신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론적 고통에 처하게 한다. 엄마도 그걸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게 하고 싶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나날. ‘나’만이 없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허물어져 갔다.


자취를 하기 얼마 전이었다. 아마 작년 말이었던 것 같다. 평소처럼 힘든 걸 털어내는 엄마에게 쓴소리를 했다. 사실 어떤 맥락의,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에게 오빠와 날 사랑하냐고 물었고 엄마는 울면서 모르겠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언제고 사랑을 입에 담던 그녀였기에 꽤나 충격적이었다. 흐느껴 우는 그녀를 보고 든 감정은, 부끄럽게도 분노였다.


엄마는 왜 계속 스스로를 잊는가. 왜 계속 아이가 되는가. 왜 계속, 자신이 사람이라고 외치는가.비합리적인 분노와 슬픔에 그녀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을 다룬다. 제주 4.3사건을 글로 담은 작가, 경하와 비슷한 류의 아픔을 영상으로 담은 인선. 글로, 영상으로 비극을 담은 그들의 심리가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그럼에도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까닭은, 제주 4.3사건을 겪은 인선의 어머니에 대한 인선의 마음이 너무도 묵직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잃었다. 형제는 잡혀갔고, 그녀는 평생을 그 사건을 좇았다. 자신의 오빠가 살아있을까봐. 그를 포기할 수 없어서. 끝없이 이어지는 악몽과 두려움은, 그녀가 아직 학살의 날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인선은 그런 어머니가 힘들었다. 어머니가 좋은 사람이기에, 그런 어머니가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어머니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는데, 저가 보호자긴 되어야할 것 같은 게 서글펐던 것 같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어. 그냥, 이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혐오스러웠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지긋지긋하고, 흠집투성이 밥상을 꼼꼼히 행주질하는 뒷모습이 끔찍하고, 옛날식으로 틀어올린 하얗게 센 머리가 싫고, 무슨 벌을 받는 사람처럼 구부정한 걸음걸이가 답답했어. 점점 미움이 커져서 나중에는 숨도 잘 쉴 수 없었어. 무슨 불덩이 같은 게 쉬지 않고 명치께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어.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작별하지 않는다 중-

'그후로 엄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야기는커녕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작별하지 않는다 중-

인선의 엄마가 죽고, 인선은 그녀의 행적을 되짚으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정확히는 경하가 먼저 말했던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름의, 눈 내리는 날 검게 죽은 나무를 영상에 담는 기획을.

인선이 이를 통해 기억하려고 했던 것, 남기려고 했던 것을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가 그저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끝내 안아주지 못했던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아직 엄마를 수용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녀가 좋고, 밉고, 애틋하고, 원망스럽다. 여전히 그녀를 사람이 아닌 엄마로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를 이해하고 싶다. 한 사람으로서 부던히 노력해 온, 아파해 온 여린 사람을 온전히 안아주고 싶다.

인선이 그러했듯 오래 걸릴 것이다. 어쩌면 끝내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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