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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난 Jun 29. 2024

호우주의보

 수능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온 힘을 다했다고 하기에도, 설렁설렁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후회하느냐 물으면 적어도 지금은 후회 없노라 답하겠다.


 학창 시절에는 학업에 몰두한다는 말로 많은 것을 미루곤 했다. 다음에 모든 것이 끝나면, 원하는 성적을 얻고 나면, 그때 가서 즐겨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고 또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미루었던 행복 끝에 얻은 것은 외레 방황이었다.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어떤 것을 바라고 무엇으로 인해 힘든지도 알 수 없는 완벽한 무지의 상태. 앎을 추구하며 매진했으나 도리어 무엇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못내 괴로웠던 나날들.

 이제는 제법 나아져 어찌저찌 나아가고 있으나 여전히 한켠에는 두려움과 더불어 살고 있다. '열심히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언제 다시 그런 상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멈칫거리게 만든다.


 작년이었나, 어느 드라마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황장애 환자들은 치료가 어느 정도 된 후에도,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는 공황생태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고.


 대부분의 병이 그러한 듯하다. 그 순간의 고통이 끝이 아니다. 나아진 후에도 질환은 흔적을 남긴다. 그런 맥락에서 완치란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불안이 더 괴로운 까닭은, 그것이 진정 괴로움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내가 느끼는 불안과 슬픔, 두려움과 우울, 그 모든 고통이 정말 고통인 것인지, 그저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허상인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도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까닭이 없다고 지껄이면서도 이 무의미한 과정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 그저 우습다.


 얼마 전, Ebsi 강의를 들었다. 그때 들은 강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하루에 5~6시간 공부하고 공부했다고 뿌듯해하는 애들 이해가 안 돼. 그거 공부한 거야? 적어도 10시간~ 12시간 이상은 해야지. 이렇게 말하니까 못하겠다고? 그럼 하지 마."


 꽤 충격적이었다. 워라벨, 소확행 등 일상 속 행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이다 보니 학생들에게도 쉼의 중요성을 가르치리라 믿었기 때문일까. 사교육도 아니고, 무수한 학생들이 듣는 공교육 채널에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노력에 포기가 따른다는 당연한 이치를 부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수험생이라면 당연히 하루 5시간 이하로 수면해야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선생, 노래 들을 틈조차 없는 삶을 강요하는 선생.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고통을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교육의 모습이 참담했다.


 얼마나 더 많은 아픔과 죽음 후에야 나아질까. 안타까움만 깊어지는 밤이다.


 우울을 견뎌내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지만 그중 가장 쉬운 방법이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풀꽃도 꽃이다'라는 책에서도 한 아이가 버거운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고자 온갖 감정을 종이에 털어낸다. 슬픔이 눈물을 통해 저물듯, 상처는 대개 드러낼 때 조금이나마 아물어갈 수 있다. 그 '드러냄' 중 한 방법이 글쓰기이고.


 누군가에게, 혹은 그 자신에게 어떠한 표현으로 감정과 생각을 보이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노력과 과정이 요구된다. 자신의 감정을 돌아봐야 하고, 그것의 원인을 추적해나가야 한다. 감정을 명명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명료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때문에 학교에서 더 많은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으면 한다. 명료하고 체계적인 글이 아니어도 좋다. 진솔하고 두서없는 글. 온전히 글쓴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글.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면,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다정한 세상까지도 이어지리라 믿는다.


 예정에 없던 브런치북을 시작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바쁘다는 이유로 일기를 쓰는 날이 적어지고, 그 때문인지 사고의 깊이가 옅어지는 것만 같아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띤,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글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마음 돌봄이 주된 목적이니만큼 두서없는 글로 채워져 나가겠지만, 부디 이 조각난 글들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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