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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해진 '객관'앞에서 쫄지 말기

by 노미화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건 아니라고 봐.”


누군가 그런 말을 했고, 나도 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의견이 ‘객관’이라는 거대한 덩치 앞에서 압도당하는 상황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 생각마저 마비된다. ‘내가 정말 틀린 건가’ ‘내 의견은 어딘지 모르게 미숙한 것 같아’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객관’이라는 것도 여러 사람의 주관이 덧칠되고 덧칠되어 ‘두꺼워진 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괜히 먼저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

생각해 보면, 일상적인 수다 속에서도 ‘객관적으로 보면’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들이 많다. 이를테면,


“나 그 사람과 연락 안 하는 게 맞는 걸까?”

“야! 하지 마 그냥. 객관적으로 보면 네가 더 아까워. 연락 안하면 그 사람이 손해지.”

(연애 감정에 객관이 어디에 있으며, 내 감정은 내가 가장 잘 아는 거 아닌가. 어딘지 모르게 너무 확신에 찬 ‘객관’이라는 말에 압도당하며 생각과 감정이 흔들린다.)



“아니, 아무리 막장 드라마지만 결말이 왜 저렇게 끝나는 거야?”

“뭐,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 결말이 제일 개연성이 있지.”

(같은 결말을 두고 완전히 다른 감상을 나눈다. 억지스러운 결말은 조금 더 덩치가 큰 객관적인 결말 앞에서 어물어물 덮여 버린다.)



“여기 커피 너무 비싸지 않아?”

“객관적으로 보면 요즘 카페 다 이 정도는 하는 것 같은데 ”

(이런 게 생각을 마비시키는 것인가)



“나 요즘 A와 조금 삐걱거려. 근데 이게 진짜 내가 예민한 건지, 아니면 A가 너무한 건지 모르겠어.”

“음......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말이야.”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무엇일까? 정말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중립적으로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나는 감정적으로 얽혀 있지 않으니까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라는 의미일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내 주관이 들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상대방은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세상에 완벽한 객관이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걸 보면, 결국 모든 것은 각자의 눈을 통해 만들어지는 진실일 뿐이다. 책을 읽을 때도 느낀다. 누군가는 이 책을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을 거라고. 같은 단어를 읽어도, 같은 문장을 따라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은 제각각일 테니. 세상을 읽어내는 방식은 다양하고, 그 하나하나는 독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 ‘독특하다’는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이상한 게 아니라 독특하고 개성 있는 각자만의 해석과 진실.



주관적 관점으로 정리한 결과물을 타인에게 보이고 합의를 모은다. 세상을 이렇게 보기 시작한 뒤로 나는 이제 객관이라는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다. 내 관점, 믿음,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을 나 아닌 타인이 납득할 수 있는 모양새로 만들어내려고 애쓸 뿐이다. (p175) 최혜진 <에디토리얼싱킹>중에서




누군가의 멋진 해석을 보며 나의 생각이 미숙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의 잣대에 비춰 내 해석이 틀렸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타인의 관점에 내 판단을 끼워 맞추려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최혜진 작가의 ‘객관이라는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내 안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내면의 고요를 깨웠다. 용기가 살그머니 고개를 든다.


설령 누군가 내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의 진실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일단 믿어보자.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고유함들이 모여 더 풍성하고 독특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그러니, 나만의 관점을 세상 어딘가에 칠해보자.


그러니 비대해진 ‘객관’ 앞에서 쫄지 말기!


이제부터라도 나는 ‘객관적으로 보면’이라는 말을 조심히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 솔직하게 말해보려고 한다.

“내 생각은 이래.” 그게 더 정직하고, 더 진실한 말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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