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당의 <적과 흑>이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다. 신분을 속이거나 없는 교양을 꾸며내어서라도 더 높은 사회적 존중을 얻으려는 인물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불안을 건드린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교양인의 흉내를 잘도 내고 있구나.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 너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와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다시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익숙한 충동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p135)
김영하 <단 한 번의 삶>중에서
오늘 분량을 읽으며 생각했다. ‘나는 이탈자가 분명하다.’ <이탈>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인이든 사회든, 안개처럼 깔려있는 궤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다. 어디로 향하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모두가 당연히 올라타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길. 나는 그 위에서 늘 조금 비껴 나 있고, 때로는 그 비껴 남이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해 씁쓸함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탈.
나에게 이탈은 도망도 아니고, 선언도 아니고, 그냥 숨 한번 제대로 쉬어보려는 시도였다. (안전함을 좋아하나 구속되는 건 또 싫어하는 나) 그건 누군가에게는 실패처럼 보여도 나에겐 오래도록 살아남는 방식의 일부분이다. 아니, 도망으로 보였으려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궤도가 있다. 태연한 얼굴, 적당한 대화, 적절한 반응.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태도. 그 궤도 위에 올라타야 관계가 시작되고, 어디쯤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성격이 정해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따르고, 서로를 그 궤도 안에서 평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고 있는 그 길이, 나는 어쩐지 자격을 증명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누구보다 그렇게 행동했으려나. 교양이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척, 아는 척, 괜찮은 척을 반복하며 불안 속에서 허둥된다. 사실은 잘 모르겠고, 사실은 잘 못하고 있는데도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땐 조용히, 이탈한다. 한발 짝 물러난다. 관계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미세하게 부서지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조금 덜 괴리감이 드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탈한 자리에서 나는 나를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알고 싶어 하고, 무엇에 흔들리며,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건지. 그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또다시 무언가를 쓰고 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진짜 나만의 궤도에 올라.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너는 작가가 아니지 않니? 하지만 늘 뭐라도 쓰고 있지.
잘 쓰지 못하더라도, 쓰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고
네 스스로 하나의 궤도를 만들었던가!’
궤도 없이 떠돌다가 우연히 빛나는 무언가를 만나고 싶기도...
#대문자N입니다
#공상#망상의세계로
#김영하작가님책임지세요
#글이너무좋잖아요
#맨탁바사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