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가 좀 예민하네요.
이해와 오해의 사이에서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결국, 우리는 날이 선, 말이 아닌 감정들을 충돌시킨다. 그렇다. 의도가 분명한 높낮이를 가진 말투, 그건 말이 아니었다. 이미 대화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예민함의 기준이 나의 감정이 되어버리면 ‘너는 너무 예민하다’라는 말은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나의 감정은 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불편한 상황에 대한 본인의 책임은 회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꼬인 상황을 풀기는커녕 그 해결과정을 생략하고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로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자신의 감정이나 시각만을 강조하는듯한 태도 때문에 저 말은 이기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다음으로 내게 건너온 남편의 말은 예민함의 뇌관을 건드리는 도화선 역할을 기가 막히게 수행했다.
"하... 그만하자."
'시작도 안 했는데, 그만은 뭘 그만해.'
평소 부정적인 감정의 역치가 낮은 편은 아니라 생각했다. 다만, 시쳇말로 감정이 '급발진'하는 경우가 있었다. 오해에 대해 무시와 회피를 해버릴 때. 한껏 올라가 있던 예민함에 대한 역치가 자이로드롭처럼 일순간 훅 꺼지듯 내려와 나는 극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속 좁은 사람이 되어있다.
서로의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예민해진다. 아니다, 사실은 우리는 둔해진다. 아니 미련해진다. 봐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며 들어야 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미련한 감각으로 놓친 것들이 소리 없이 내려오는 눈처럼 차곡차곡 감정의 밑바닥에 쌓인다. 수북이 덮여 서로가 파묻혀 버릴 때쯤, 우리는 그제야 새삼, 예민하다는 말로 서로가 서로를 할퀴어버린다. 켜켜이 쌓인 답답하고 농한 감정들이 내 입술이며, 눈이며 손끝이며 발끝까지, 온몸을 뚫고 기어 나온다. 예민한 게 아니라 너무 둔해서 미련해서 뒤늦게 터져 나온 감정들의 행패였다. 제때 꺼내지 못한 이해와 배려는 둔해질 대로 둔해져 결국 오해와 이기심을 불러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그러했다. 괜찮다고 별일 아닐 거라며 감정을 숨기고 죽였던 평소 나의 태도는 정말 별일도 아닌 감정싸움에도 불안의 스위치가 딸깍거리며 눌러졌다. 일상의 평온함에 균열을 내는 그 딸깍거림은 불안한 과거와 함께 온갖 부정적인 상상들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내 인생의 목록에 결혼은 없었다. 가족이란 싫어도 미워도 같이 살아야 하는, 끊어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혹여 어른이 되더라도 결혼이라는 것 안에 나를 가두지 않기로 어릴 적부터 마음을 먹었다. 숨 막히는 불안들이 또다시 반복될까 두려워 결혼이라는 것을 내 인생에서 완강히 밀어냈었다. ‘저렇게 살 거면 차라리 헤어지지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자식으로서 무례한 마음, 불손한 태도를 가진 적도 많았다. ‘너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지’라는 말은 진정 우리를 위하는 말일지라도 비겁하게 들렸고, ‘너희가 중재하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됐다’라는 말은 왠지 억울했다. 이루어지지도 않을 ‘화목한 가정’을 소원이라고 비는 어린 나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말이었다. 우리가 빨리 어른이 되어야 이 불협화음도, 말도 안 되는 이해논리도 끝이 나겠구나 생각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시간은 딱 거기까지만 해결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나이만 채운 아이가 되었다.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엄마도 그해 결혼을 졸업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았으면 좋으련만. 20년의 ‘엄마’라는 이력은 ‘진짜 세상’에 내어놓을 대단한 경력이 아니었음을,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엄마는 온몸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살아온 날들보다 육체적으로 더 고단한 삶을 시작하는 엄마였지만 어쩐지 마음은 자유로워 보였고 웃음도 많아졌고 여유도 있어 보였다.
스위치의 딸깍거림이 어째서 현재의 감정이 만든 균열을 지나 불안한 과거 그리고 엄마의 자유까지 가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내가 예민하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듯하다. 왜 이리도 가벼운 공기 같은 ‘사랑’,‘행복’에 집착하듯 생각이 기울까 고민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모든 것들에는 ‘불화’라는 무거운 공기가 틈을 파고들 일은 없을 거라며 예민함의 역치를 거짓으로 끌어올려다 놓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고로 내가 예민해지는 건 상대방의 말투와 행동 때문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목한 가족에 대한 강박이었고 나의 선택에 대한 자만과 오해 그리고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핍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인가 보다. 결핍으로 오는 어떤 뒤틀린 욕망은 행복도 사랑도 비참하게 만든다는 걸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로부터 배운다. 마흔이 넘어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 낯설고 어설프지만 진하게 다가온 ‘사랑’들을 더 예민하게 느끼면서.
그러니, 우리 대화는 마저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