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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Oct 08. 2024

싸움의 기술, 그런 거 없습니다.

유치하고 은근한 평화주의자들

“당신도 저번에 똑같이 그랬잖아!”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

      

 “얘기 좀 해.”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그것은 더 답답한 자의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험한 말 하나 오가지 않았지만, 우리의 다툼은 조용히, 그러나 살벌하게 이어졌다. 말보다 표정이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비언어적인 표현은 때로 관계의 흐름을 전복시킨다. 표정, 몸짓, 시선이 감정을 증폭시켰다. 같은 말이라도 감정에 따라 꽃이 되기도 가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걸 오해라고 부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가 아닌 의도된 것일 때도 있기 마련이다.  삐딱한 마음의 선제공격이 그러하듯.     


너는 되고 나는 안된다.      


 사실 별일도 아니었고, 서로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말은 헛돌고, 감정의 날카로운 촉은 서로를 향해 날아들 준비가 끝났다. 시시한 문제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다 보니 대화는 겉돌았고, 말 대신 서로의 마음에 날 선 감정만 꽂혔다. 그다음은 누가 더 많이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한 억울함의 설파 혹은 변명이 난무했다. 그 자리에 제삼자가 있었다면 유치하지만 버거운 이 전투에 한마디 했을 것이다.     

“둘 다 아주 그냥, 똑같네.”     


 그렇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는 너무나 닮았다. 차라리 눈앞에 불꽃이 튀도록 격렬한 싸움이었으면 더 나았으려나. 제대로 된 공격이라는 것 하나 없이 은근히 감정을 긁고, 차갑게 다투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공격적인 말들은 웅얼웅얼 얼버무리고 눈으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때로는 한숨으로 나왔다. 어딘가 르게 미적지근하면서도 은근히 기분 나쁜 이상한 평화주의자들이었다.  날 선 감정들의 고요한 투닥거림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그 경계에 기다란 장마전선을 만들어냈다.  

 

 눅눅하고 불쾌한 감정이 우리 사이를 잠식했다. 우리의 감정도 비슷하게 지쳐갔다. 감정이 피폐해지고 환상과 소망을 잃어버릴 때쯤이면 서로가 무감각해졌다. 연대의 상실, 무감각, 권태와 같은 피상적인 감정에 시달리다 결국 혼자 나직이 내뱉었다.      

‘인생 헛살았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떠한 것들이 나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관심이나, 애정과 같은 것들이 반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인생의 ‘허무’라는 이름의 감정에 도달했다. 공들여 쌓는 것은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만큼 ‘관계’라는 걸 중요시했던 우리였기에 아마도 이상하고 미적지근한 평화주의자의 탈을 각자 쓰고 있었던걸 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너도 되고 나도 된다.      


다음날, 축 늘어진 일상의 중심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내 마음이야!”

“니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두 아이가 맹렬히 싸우기 시작했다. 투닥거리던 감정싸움은 어느새 말싸움으로 번졌고, 이내 육탄전으로 치달았다. ‘둘 다 똑같네!’ 마음속에서 웃음이 나왔다. 한 차례의 태풍이 지나갔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엉망이 되었지만, 둘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희희낙락거리며 다른 놀이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평화로워 보였다. 저 작은 비평화주의자들이 문득 신기하기도, 어이없기도 했다.

 ‘꼬맹이들, 인생 잘 사네.’     


 차라리 우리도 기꺼이 태풍의 위험반경 속에 우리를 솔직하게 내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위험반경이라는 건 어쩌면 아이들의 그 하찮은 투닥거림처럼, 유치함과 솔직함의 경계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지나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오랜 장마전선 위의 외로운 감정과 오해, 위화감이 결국 우리를 덮쳐 공허함과 우울이라는 이름으로 변해 서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이전에 말이다.


 다음번에는 아이들의 저 말을  써먹어봐야겠다. 생각해 보니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 그 말.      

‘니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이왕이면 팔짱도 끼고,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며 말하는 거다. 그 유치한 모습에 날 선 감정들이 무너지고, 무감각, 권태 대신 어이없는 웃음만 남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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