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버스 도착 시간이 가까워져서, 급한 마음에 몇 초 남지 않은 신호등 신호에 무리에서 달린 적이 있었다. 덕분에 가까스로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탔지만 그날따라 어쩜 버스가 그리 고요한지.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그런 고요함이 내게 갑자기 확 와닿은 이유는, 내 숨소리가 의식할 수밖에 없을 만큼 거셌기 때문이다. 안 봐도 뻔한 내 붉은 얼굴에, 버스는 이미 두 정류장이나 지나갔는데도 여전한 내 헥헥거림까지, 민망스러웠다.
이제 나는 10대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급히 뛰었다고 해도 50m도 안 되는 거리를, 이렇게나 거창하게 뛸 셈인가. 나는 이제 서두르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다음으론, 굳이 서두르지 않는다.
운전을 하면서 조바심이 든 적이 있다.
2차선을 잘 가다가, 분명 내 뒤에 있던 차가 나를 답답히 여기며 1차선으로 추월해 이동했던 그런 순간,
나는 정속 주행을 하면서도 마음은 그 앞서간 차를 향해있던 때가 있었다.
시야에서 금방 달아나버린 그 차를 보면서 새삼 앞차가 답답하기도 하고, 제때 차선 변경을 하지 않은 내가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동시에 비례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 차들을 난데없이 다시 조우하는 순간'
분명 훨씬 앞서서 갔을 것만 같은데 도착지 근처에서 불쑥 보이거나, 혹은 내가 그 옆을 지나쳐 가는 그런 순간들이 가끔 생기더라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그 답답함을 못 이기고 쌩하고 달렸을 때도 있었다. '어쩜 저렇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갈 수 있지?' 답답한 마음에서 차선을 바꾸고 신나게 달리다가 다시 그 차를 백미러로 보게 됐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허망함이란.
물론 차가 꽤나 막히는 출퇴근 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차가 더 빨리 도착할 확률은 대부분 더 높을 것이기에 결코 이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이후부터 굳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주황색 불이 켜졌을 때 굳이 더 밟으며 앞서나가지 않기로 했고
인도에서도 초록색 신호가 깜빡거리며 나를 초조하게 만들어도, 그냥 그냥 느긋하게 걸어보기도 했다.
당장에 급히 그 길을 건넌다고 해서 내가 더 빨리 도착할 것도 아니며,
내가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고 해서 내가 대단히 많이 늦어지지도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굳이 서두르지 않게 된 것이다.
속도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앞서 나가는 걸 누군들 싫겠냐만은, 그걸 우선순위에서 조금 더 아래로 밀어 놓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나는 도착지점까지 잘 갈 수 있을 테고,
거기까지 가는데 조바심을 느끼면서까지, 혹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까지 허둥지둥 가고 싶지는 않다.
나의 서두름이 가져오는 조금의 앞섬보다는
가는 길 속에서의 나만의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서는 지금의 모습이 더 좋다.
잘 갈 수 있으면 된다. 조바심 내지도 않아도 된다. 이런 일상의 여유가 나를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