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4] 맛으로 기억하는 이탈리아
이탈리아에 커피 마시러 갈래?
이탈리아의 아침은 커피 향으로 깨어난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커피머신의 증기와 갓 구운 크로아상의 향이 뒤섞여 공기를 데운다. 현지인들은 바(Bar) 앞에 서서 단숨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가게를 나선다. 그 짧고도 진한 순간의 리듬이, 이탈리아의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도 동네 카페에 들러 크로와상과 함께 한 잔의 에스프레소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어느새 루틴이 되었다.
“우리 이탈리아 사람 다 된 것 아이가.”ㅋㅋ
어느새 우리 여행과 늘 함께 한 커피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로마, 성 바오로대성당의 한 켠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한 잔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당, 그토록 가보고 싶던 곳이다. 성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성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건함이 공간을 채운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성당 마당 한 켠의 작은 편의점 겸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다. 빵과 과자 사이에 놓인 커피머신에서 나온 한 잔의 에스프레소.
커피는 놀랍도록 맛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도 단번에 중심을 잡아주는 맛.
혼자였기에 더 느긋했고, 그래서 더 깊이 남은 한 잔이었다.
베네치아 ― 가판대의 커피가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야?
베네치아의 버스정류장 앞, 그냥 평범한 가판대에 불과하다. 빵과 음료수, 담배를 파는 조그만 매대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기대는 거의 없었다.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담겨 나온 한 잔의 커피는 유독 차가운 날씨 속에서 김이 모락 모락 올라온다. 나는 이곳 가판대에서 두 번 놀란다.
‘이런 가판대에서도 에스프레소 잔에 커피를 준다고?’ 종이컵이 아닌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잔에 나온 커피에 한 번 놀라고, 그 다음은 첫 모금에 놀란다. 짧고 강한 향, 깔끔하게 떨어지는 산미.
‘이 정도 퀄리티의 커피맛이 이런 가판대에서도 나온다고?’
이내 나는 왜 이탈리아 커피를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지 몸소 받아들인다.
세체다 ― 가장 비싼 카푸치노
세체다로 향하는 케이블카 요금은 1인당 41유로. 꽤 비싼 값이지만, 그만큼의 풍경을 기대했다. 혹시 짧게나마 하이킹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이탈리아까지 와서 김밥까지 싸서 도시락을 준비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자 모든 기대가 하얗게 묻힌다. 온통 눈뿐이다. 구름이 내려앉아 산의 능선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엔 스키복을 입은 사람들뿐, 그들 사이에서 우리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스키 장비 하나 없이, 어딘가 어색하게 서 있다. 그들의 시선이 묻는다.
‘왜 스키복도 없이 여길 올라왔지?’
그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겨울의 세체다에서는 스키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결국 산장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안에서는 커피 향이 피어난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스키 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날의 커피는, 41유로짜리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야 마실 수 있었던 한 잔이었다. 결국 세체다는 우리에게 가장 비싼 카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만은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구름 속 산장, 창밖의 눈, 그리고 그 안에서 잠시 쉬어가던 우리.
Salonetto ― 폭설의 아침, 모카 커피 한 잔
세체다에서 돌아온 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머무는 산 중턱의 마을, Salonetto에도 폭설이 쏟아진다. 갑자기 불이 꺼진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정전이지?”
우리는 발코니로 나간다. 동네 전체가 암흑이다. 얼마 있지 않아 숙소 주인이 찾아온다.
“전신주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어요. 지금 고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숙소 주인은 익숙한 일인 양 초를 건네며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그 침착함 덕분에 우리도 금세 안정을 되찾는다.
다음날 아침, 창문을 열자 세상이 바뀌어 있다. 마을 전체가 하얗게 변해 있다. 지붕, 나무, 도로, 자동차까지 모두 눈 속에 잠겨 있다. 밤새 폭설이 만든 또 하나의 세상이다. 길은 미끄럽고, 차는 묻혀 있다.
오늘의 일정은 아무래도 무리다. 오늘 계획은 접기로 한다. 대신 천천히 아침을 즐기기로 한다.
모카포트를 꺼내 물을 붓고, 커피 가루를 채운다. ‘칙칙’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피어오른다. 따뜻한 커피를 잔에 따라 발코니로 나간다. 온통 하얀 세상,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가 새하얗게 느껴진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조금 투박하지만, 그 안에 묵직한 맛이 느껴진다. 쓴맛 뒤에 남는 고소한 여운이 폭설의 냉기를 천천히 녹인다.
우리는 발코니 의자에 앉아 하얗게 덮인 마을을 바라본다. 말없이, 아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다.
그날의 커피는 특별한 원두도, 멋진 카페의 잔도 아니었다.
그저 폭설 속에서 잠시 멈춰 선 하루, 긴 여행의 쉼표가 되어준 한 잔이었다.
카레자 ― 겨울왕국으로 들어가던 날의 커피
돌로미티를 떠나 시르미오네로 향하던 길, 우리는 카레자 호수에 잠시 들르기로 한다.
길은 점점 하얗게 변해간다. 어제 내린 폭설로 세상 전체가 눈으로 덮였다. 마치 우리가 겨울왕국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나무들은 두꺼운 눈옷을 입고, 그 무게에 눌린 듯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다. 도로 양옆으로는 눈이 벽처럼 쌓여 있고, 공기는 차갑고 투명하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어디까지가 호수이고 어디부터가 땅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온통 세상이 하얗다. 바람이 세게 불고, 손끝이 금세 얼어붙는다. 그 아름다움은 현실 같지 않지만, 추위는 현실이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리는 근처 카페로 향한다. 카레자 호수와 가장 가까운 작은 로컬 카페. 문을 여는 순간, 커피 향이 공기처럼 퍼진다. 안에는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잔이 놓이는 소리, 스팀 밀크의 ‘쉬익’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까지 — 모든 게 따뜻하게 들린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첫 모금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얼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린다. 창밖은 여전히 눈으로 가득하지만, 카페 안은 잔잔한 온기로 빛난다.
그날의 커피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바라보던 불빛 속으로 살며시 들어온 듯한 순간이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세상 한가운데에서 잠시 머물다 간, 포근한 온기의 시간.
모데나 ― 햇살 아래의 카푸치노
시르미오네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모데나.
발사믹 식초를 사러 잠시 들른 도시지만, 막상 도착하자 가장 먼저 찾은 건 화장실이다. 그렇게 발걸음이 닿은 곳이 두오모 뒤편, 노천 테이블이 놓인 작은 카페다.
1월의 공기가 차갑지만, 햇살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광장을 감싼다. 형형색색의 건물 사이로 스며든 빛이 테이블 위를 은은하게 비춘다. 하얀 잔에 담긴 카푸치노는 부드럽게 김을 올리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크로와상이 곁에 놓인다. 이탈리아 여행 열흘째, 이제는 우리도 현지 사람들처럼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모데나의 카푸치노는 특별할 것 없는 한 잔이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햇살, 대화 소리, 잔의 온도, 그 모든 게 어쩐지 편안하고 익숙하다. 잠시 머문 도시인데, 그 순간만큼은 여행이 아니라 일상의 한 장면 같다.
피렌체 ― 서둘러 마신 한 잔의 에스프레소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친퀘테레로 가기 위해 숙소 문을 나선다. 피렌체의 거리는 고요하고, 공기엔 아직 밤의 찬기가 남아 있다. 산타 노벨라역으로 가는 골목길을 걷다가 후문 쪽에 불이 켜진 작은 카페 하나를 발견한다. 유리문 너머로 따뜻한 조명이 비친다. 안에는 출근길에 들른 동네 사람들이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관광객은 우리뿐, 그들의 일상에 잠시 스며든 기분이 든다.
기차 시간이 촉박해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에스프레소와 크로와상을 주문한다. 작은 잔이 손에 쥐어지고, 크로와상에서는 맛있는 빵냄새가 희미하게 난다.
단숨에 들이킨 에스프레소는 짧았지만 깊고, 강렬했다. 쓴맛이 아닌 향이 먼저 입 안을 채운다. 서둘러 나서는 길에도 그 향이 남아 기차를 타고 떠나는 동안까지 따라왔다. 채 5평도 안 되는 카페였지만, 그 아침의 기억은 유난히 선명하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그 짧은 10분이 피렌체의 아침을 완벽히 기억하게 한다.
잠시 스쳐 지나간 하루의 시작, 그 한 잔의 에스프레소가 내 기억 속 피렌체의 맛이 되었다.
레체 ― 여행의 끝에서 마신 커피, Quarta Coffee
여행의 막바지, 레체의 아침. 끝이 다가온다는 아쉬움을 안은 채,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이곳 Quarta Coffee에서 만나기로 한다.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한다. 문을 여는 순간, 볶은 원두 향이 공기를 감싼다. 이곳은 생각보다 컸다. 2층으로 이어진 공간은 단정하고 차분했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만큼 깊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잠시 후 심이 도착했고, 우리는 함께 커피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하얀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 그 짙은 향이 오래 머문다.
잠시 뒤 추가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레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첫 모금의 쌉싸래한 맛, 그 뒤로 남는 진한 고소함이 마음을 묘하게 울렸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각자의 생각 속에서 여행의 끝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날의 커피는 특별히 화려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난히 깊은 맛이었다. 잔을 내려놓을 때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제 정말, 여행이 끝나가고 있구나.
에필로그 ― 커피 향이 남은 여행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커피가 있었다. 성당의 마당에서도, 눈 덮인 산장에서도, 기차역 앞의 작은 바에서도 우리는 늘 커피를 마셨다. 그 한 잔 한 잔은 도시마다 달랐고, 그 맛의 차이는 마치 그곳의 공기와 사람들의 온도 같았다.
로마의 커피는 경건했고,
베네치아의 커피는 짧고 강렬했으며,
세체다의 커피는 고립된 산장 속의 위로였다.
Salonetto의 커피는 폭설 속의 온기였고,
카레자의 커피는 차가운 세상 속에서 피어난 작은 불빛이었다.
모데나의 커피는 햇살처럼 부드러웠고,
피렌체의 커피는 서둘러 떠나는 여정의 리듬 같았다.
그리고 레체의 커피는, 여행의 끝에서 조용히 마음을 감싸준 마지막 향이었다.
이제 여행은 끝났지만, 커피 향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 향을 떠올릴 때마다, 이탈리아의 아침이 다시 시작되는 것만 같다.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