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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시시,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곳

여기 이탈리아 맞아? / 아시시(이탈리아 중부)

by Joanna

같이, 때론 혼자 이탈리아 ✈ 외국어를 몰라도 당당한 중년의 이탈리아 여행법

여기 이탈리아 맞아? / 아시시(이탈리아 중부)




아시시,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곳


토스카나에서의 1박이라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길을 달려 아시시로 향한다.

멀리 언덕 위로 펼쳐진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성을 중심으로 베이지 빛깔의 건물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겨울 햇살 아래 단정하게 빛나고 있다. 길가의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ASSISI’라는 표지판이 보이자,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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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아시시인가 봐.”

“벌써부터 기운이 다른 것 같지 않아?”

“건물 색깔 봐. 화려하지 않은데 오히려 절제된 멋이 있네.”

돌담이 이어지는 풍경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이 도시 전체를 차분하게 감싼다.



붉게 물드는 성프란치스코 대성당


수도원에 짐을 풀고 대문을 나서자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고, 아시시는 서서히 붉은빛을 머금기 시작한다. 낮 동안의 차가운 돌담은 노을 속에서 따뜻한 색조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따로 흩어져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작은 마을을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나는 수도원 문을 나서 몇 걸음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만다. 성당 뒤로 번져오는 주황빛 노을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자, 돌담과 지붕들이 붉게 타오르는 듯 물든다. 아시시는 그 순간, 온전히 ‘붉은 마을’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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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도 나는 여전히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 하나둘 불이 켜지는 모습이 마치 하늘의 별들이 땅 아래로 내려앉은 듯하다.


한동안 넋 놓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성당의 하얀 벽면이 또 하나의 무대로 바뀐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펼쳐지는 영상 프로젝션이다. 밤하늘이 성당 벽에 내려앉은 듯, 푸른빛 속에서 별들이 반짝인다. 그 속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별이 쏟아지고, 하늘이 열리듯 펼쳐지는 화면을 바라보며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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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로 물든 붉은 성당, 하나 둘 작은 불빛들로 물들이는 마을의 풍경, 그리고 깜짝 선물처럼 내게 건넨 성당 벽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영상. 아시시의 저녁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내 안에 새겨진다.




성자의 도시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심은 평소 술을 거의 안 한다. 여행을 하면서도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정도가 전부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벌써 두 번째로 꽐라가 된다. 첫 번째는 피렌체 자자 레스토랑.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추위에 덜덜 떨고 나서 마신 와인 두 잔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비틀비틀 숙소로 돌아가던 모습이 우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성스러운 아시시의 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주문한 스프리츠가 문제다. 평소 마시던 것보다 도수가 훨씬 센지, 한두 모금 마시자마자 심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확 올라온다. 그러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고개를 푹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베개라도 발견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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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심의 귀여운 술주정은 시작된다. 내 몸에 의지한 채 촐랑촐랑 발걸음을 옮기는 심. 걷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보는 우리도 알 수 없다. 추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는다. 성스러운 아시시의 고요한 밤거리에 우리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성자의 도시에서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다시 보니, 신성한 아시시가 주는 평화로운 기운 속에서 이 작은 술주정조차도 다 품어주는 듯하다. 결국 성스러운 도시가 허락한 건 경건함뿐 아니라 이런 인간적인 웃음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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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시시의 아침


해 뜨기 전 잠을 깬 나. 코 끝이 시리다.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걷고 ‘후~’ 하고 숨을 내뿜자 입김이 뽀얗게 퍼진다. 춥다. 여긴 수도원이 맞구나. 그것도 성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따라 살겠다고 나선 수도원을 인증이라도 하려는 듯 청빈의 삶을 새벽에 누운 채 후~ 하고 내뱉은 숨결에서 느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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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서자 마을은 고요하다. 돌담길은 아직 어둠을 머금고 있고, 간간이 수도복 차림의 수도자들이 손을 품에 넣고 천천히 걸어간다. 그 모습은 이 마을의 풍경과 하나로 이어진다.

회색빛 새벽 하늘 아래, 오래된 성벽과 담백한 건물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묵직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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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따라 걷다 문득 내려다본 풍경. 아치 사이로 언덕 아래 마을과 평야가 드러나고, 멀리 희미한 산맥이 겹겹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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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세워둔 작은 말구유 장식과 프란치스코 성인을 상징하는 설치물들이 보인다. 새벽의 정적과 함께 그 단출한 장식들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아시시의 1박 2일은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아침 미사로 끝이 난다. 작은 마을이다. 마음만 먹으면 채 두 시간도 안 돼서 돌아볼 수 있다. 유명한 관광지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시간이 모자란 듯 아쉬움이 밀려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아시시는 ‘무엇을 보는 곳’이라기보다 ‘그냥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곳이기 때문이다. 돌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 골목에 울려 퍼지는 발걸음, 수도자들의 고요한 걸음걸이. 그 모든 것이 여행이 아니라, 일상의 한 조각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1박 2일은 유난히 더 짧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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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여행 후 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여행한 도시 중 어디가 기억에 남아?”
“아시시와 마테라야.”
마테라는 충분히 예상했는데, 아시시는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심이 밝힌 이유는 이랬다.
“아시시는 내 안에 정보도 없었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은 도시야. 가톨릭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 특별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머무르는 내내 편안하고 좋았어. 그리고 수도원에서 내 손목을 잡고 ‘Be Calm’이라고 말해 준 수녀님의 그 한 마디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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