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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y 22. 2021

오뎅 두 개만 사 먹으랬는데, 네 개를 사 먹었다

"오빠, 지금 병원 끝났어요?"

"응. 지금 끝났어."

"오빠, 배고프니까 오뎅 두 개만 사 먹어요."

"응. 빨리 집에 갈 게."


나는 이 주에 한 번씩 화성 봉담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온다. 스물 한 살 군대에서 조울증이 시작되었다. 조울증으로 군 입대 6개월도 안 되어 의가사 전역하였다. 난 만기 제대를 하고 싶었지만, 군대에서는 집에 가라고 했다. 빤스 한 장 양말 한 장 전부 군 병원에 반납하고, 어머니께서 가지고 오신 사복을 입고 제대를 했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약을 안 먹으면 지랄 같지만, 약 잘 먹고 스트레스 안 받으면 괜찮다. 여기서 스트레스란 일반 스트레스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스트레스이다. 나의 조울증이 재발한 케이스를 보면 둘 중에 하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약을 먹지 않거나, 내가 사랑하는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였다. 이 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전문의 선생님과 상담하고 약을 타 온다. 조울증으로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은 아니고, 조울증의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 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약을 타 온다.


내 주치의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신데 나에 대해서 대단히 대견해하신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상태가 상당히 안 좋을 때 나를 처음 보셨다. 마흔 살 이제 갓 넘은 한창때인 내가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볼 때'라고 이야기하면 누군가 어르신들 깨서는 코웃음이 나겠지만,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볼 때', 내 조울증 인생 중에서 3대 위험한 시기가 있었다. 처음 조울증이 발생했던 2000년 군대에서였고, 2009년 춘천에서 혼자 자취를 할 때였고, 2014년 개인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나와 혼자 고시원에서 살 때였다. 물론, 그 개인 사정이란 것 또한 근무하던 초등학교에 여선생님이 지나치고 예쁘고 착했던 것이다. 2014년에는 짝사랑의 실패가 바로 조울증 재발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예쁘고 착한 여선생님을 사랑했지만, 예쁘고 착한 여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았지만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준비하던 고백도 포기했다. 고백할 기회도 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예쁘고 착한 여선생님을 내 마음에 내려놓기로 했는데, 그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수업 준비는 되어 있지 않고, 손까딱 할 육체적 정신적 힘이 없는데, 학교의 내 책상 위에는 업무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그 주 통째로 병가 내고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에, 그다음 주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출근해서 쉬는 동안 빠졌던 수업 보강하고, 다른 생각하지 말고 눈썹 휘날리게 그동안 밀려 놓았던 일을 다 처리하고 그 학기를 마무리 짓고 여름방학에 들어가면 되었다.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기를 권유하셨지만 그만두었다. 그 사건이 바로 조울증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다가, 동두천의 수도원의 금식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했는데, 약 말고 금식과 기도의 힘으로 조울증을 극복해 보자고 했다. 금식하는 동안 금식 끝나고 한동안은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원래 조울증 환자가 약을 끊으면, 당장은 잘 아는 주치의가 아닌 다른 사람 눈에는 더 좋아 보이기도 한다. 그 시간이 지속되면 기분이 붕 뜨고 사고를 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이다.


2014년 그 해 가을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심했던 위기였다. 조울증이 처음 발생했었을 때는 큰 위기가 아니었던 것은, 군대에 있었을 때고 내가 조울증으로 붕 뜨자마자 부대 중대장이 바로 상황을 인지하고 군 병원에 데리고 가서 입원시켰다. 조울증이 발생한 즉시 입원을 했기 때문에, 크게 사고를 치고 위기에 빠질 시간 공간 자체가 없었다. 적절하게 치료가 이루어져 증세도 빨리 가라앉고 말이다. 물론, 군의관은 더 이상 군생활은 어렵겠다고 판정을 내리고 제대를 시켰다. 내 인생 최대 위기는 2009년이었다. 길에서 객사할 수도 있었던 위기도 몇 차례 있었다. 2014년은 그 이후 내 인생에 두 번째 큰 위기였다. 그때 지금 주치의 선생님을 입원 병원에서 만났다. 나 스스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가 아니라, 강제로 입원당했을 때 정신줄 놓았을 때 지금 선생님을 만났다. 지금 개인병원을 개원하시기 전에 화성 병점의 입원 병원에서 페이닥터를 하고 계셨다.


주치의 선생님은 2014년부터 나를 줄곧 보셨고, 내가 얼마나 사람이 되었고 좋아졌는지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시선에서 제일 잘 앍고 계신 분이다. 본인 환자가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제정신 차리고 잘 사니까 선생님도 보람이 있으신 것 같다. 선생님도 내가 좋아진 결정적인 이유가 아내 에미마의 사랑이라고 동의하신다. 물론, 병원 다니면서 약 먹고 기분조절을 하면서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으니, 아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러 가지 이유로 가볍게라도 재발이 되었고 마음과 생활에 안정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는 내 인생의 최고의 약이고, 9월 17일 세상의 빛을 볼 예정인 아내의 뱃속의 우리 사랑의 열매 태명 사랑이는 나의 최고의 선물이다.


이 주마다 한 번씩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가서 짧게 상담을 하고, 약을 탄다. 선생님께서 날 보면 내가 어디가 안 좋다고 호소 안 해도, 내 행동과 말을 보고 내가 조증이 떴는지 판단이 가신다. 기분이 좀 뜨면 더 떠서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약을 조절해서 기분조절을 한다. 조울증을 조절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게 아내 에미마의 사랑 때문 만은 아니다. 의학의 힘도 있다. 주치의 상담과 약물치료로 조울증을 조절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격주로 병원에 가고, 오늘이 병원에 가는 날이다. 오늘은 다른 휴일보다 일찍 눈이 떠져 7시에 일어나서 마루에 나와 글을 썼다. 글을 쓰며 아내가 일어날 시간을 기다리다 보니 병원 갈 시간이 다가왔고 아침 먹을 시간이 없었다. 아내는 아침을 먹지 않은 내가 밖에서 배고플 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아내는 결혼 전에 혼자 살 때는 세 끼 다 챙겨 먹지 않았다는데, 내가 같이 있으면 세 끼 꼬박 먹인다. 물론, 아침에 국과 밥을 먹는 것은 아니다. 우유에 시리얼을 먹거나, 삶은 계란을 먹거나 그 정도이다.


병원을 마치고 계산을 하면 아내 스마트폰에 뜬다. 아내는 내가 병원에서 몇 시에 나온 지 그것으로 아는 것이다. 그 시간에 맞추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오뎅 두 개만 카드로 사 먹으라고 말이다. 나는 오뎅 네 개를 사 먹었다. 왜냐하면 아내랑 보통 사 먹는 오뎅은 하나에 1000원인데, 병원 앞 '김종구 부산어묵'은 오뎅이 500원이다. 그래서 두 개 사 먹는다고 하고 네 개를 사 먹었다. 아내에 폰에는 2000원이 뜰 테니, 내가 오뎅을 두 개만 먹었는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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