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최다함이다. 최선을 다하라. 다윗과 아브라함.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세 가지 뜻으로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형제만 4형제 중 막내셨다. 나에게는 큰 할머니가 되시는 할아버지의 큰 형수님의 전도로 할아버지께서는 결혼 전부터 교회에 다니셨다. 나만 모태신앙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3남 4녀 중 장남이셨던 나의 아버지부터 시작하여 할아버지의 자손 모두가 모태신앙이다.
명절과 돌아가신 할머니 기일에 온 가족이 모이면 둘러앉아 먼저 예배를 드린다. 예배의 시작은 찬송가 《사철의 봄바람》이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와라 임마누엘
복 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할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가난한 농부셨다. 가정과 교회 밖에 모르고 사시며, 칠 남매를 믿음으로 키우셨다. 칠 남매를 목사니 선생님 한의사로 키우셨고, 칠 남매 중 여섯이 목사님 또는 사모님이 되셨다. 쌀농사 밭농사는 변변치 못하셨을지 모르나, 자식농사는 성공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일흔 조금 넘기셔서 암으로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다. 매년 할머니 기일에 온 가족이 모여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며 가족 수련회를 한다. 97세 할아버지께서는 요양원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나의 꿈은 책 읽고 글 쓰고 유튜브 하고 강연 다니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주로 에세이 장르에 관심이 있다.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 신앙서적을 쓰고 싶은 생각은 딱히 없다. 쓰고 싶은 기독교 신앙서적이 딱 한 권 있다면. 제목이《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이다. 평생 가난한 농부셨지만 성공한 자식농사꾼이셨던 할아버지 이야기다. 우리 집 이야기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아버지께 직접 듣기에 하나님나라 문 앞에 계신 할아버지는 연로하셨다. 할아버지의 자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언젠가 쓰고 싶다. 내가 기획하고 정리하여 글을 쓰지만, 우리 집안 식구들과 할아버지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집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시절 신학교에 가셔서 목사님이 되고 싶으셨다.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전도자로 살고 싶으셨다. 당시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이 한국에 수차례 방문하여 전도집회를 가지기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 되고 싶으셨다.
가난한 농부 7남매의 장남이셨던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와 함께 어린 동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지 못하셨다. 우리 집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 시절 대한민국의 다른 집도 대동소이했다. 가난한 집에서 장남 장녀가 일찍 생활 전선에 나가 아버지와 함께 동생들을 키우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아버지께서는 교대에 가셔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셨다. 당시 학교 선생님은 지금처럼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특히 남자 선생님은 더 그랬다. 유공무원 보수는 박봉이었다. 다만, 교대는 2년제였고 학비가 쌌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것은, 교대 남학생은 지금 학군단 ROTC와 비슷한 RNTC에 편성되었다. 2년 교대 다니는 동안 RNTC 하고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면 군대 문제는 해결되었다. 학비를 적게 들이지 않고 빨리 졸업하여 빨리 안정된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진로를 선택하셨다.
아버지 성품에 초등학교 선생님은 천직이셨다. 아버지께서는 담임 맡은 반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방학 때 반 아이들 전체를 우리 집으로 불러 하루 재우며 1박 2일 수련회를 하시기도 했다.
가는 학교마다 같은 학교 선생님 몇몇이 모여 신앙활동을 하는 소모임인 신우회를 조직하셨다. 가는 학교마다 기독학생반을 조직하셨다. 점심시간 쉬는 시간 아이들을 모아 신앙활동을 하는 동아리 활동이다. 우리 집에는 일반 가정집에는 없는 복사기와 고속 테이프 복사기가 있었다. 고속 테이프 복사기는 한 번에 카세트테이프 다섯 개가 앞뒤로 고속으로 복사되는 기계였다. 은혜롭고 재미있는 설교 간증 테이프를 편지에 동봉하여 동료 선생님들과 담임 반 학부모님들께 전도편지를 보내셨다.
받는 분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았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전도편지를 받은 수신자들이 아버지의 신앙에 공감을 했다기보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에 공감을 했을 것이다. 목사님이 되고 싶으셨던 아버지께서는 목사님 같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셨다. 나중에 야간 신학대학원을 나오셔서 목사님이 되셨다. 학교 선생님을 하시며 개척교회를 설립하여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으시고 자비량으로 봉사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나의 어린 시절 어떤 면에서 아버지는 전설과 같은 분이었고 나의 우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께서 가장이셨던 우리 집 가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나의 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다. 나는 항상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걸어 다녔는데, 내가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이전까지 나는 동요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만 불렀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당연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특별히 착했다기보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다.
거리에 구걸인이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 주었고, 장거리에 장애인이 있으면 달려가 부축해 주었고, 거리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봉투를 가지고 다니며 주웠다. 학교에서 왕따로 보이는 친구가 있으면 그의 친구가 되어 주려 했다. 내가 왕따 또는 아싸인지 알고 나의 친구가 되어주려 했던 인싸도 있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기에 따라 나는 스스로 세상을 왕따 시킨 왕따였는지도 모른다. 세속으로부터 스스로 구별되었다는 접에서 바람직한 신앙인이었지만, 그 또래의 성장과 발달을 생각할 때 고독한 청소년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