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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정수 Jul 12. 2023

돌아가는 길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주머니도 하나 없는 바지춤으로 벌써 찬바람이 서걱거린다. 얼굴은 곱게 화장을 마쳤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번쩍 뜰 것 같은데, 그 위로 덮는 면모와 고깔이 작별을 고한다.   

  

  ‘공수래공수거’라 했던가. 엄마의 입관을 거행 중이다. 빈손으로 온 몸이 마지막 옷 한 벌을 건졌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수의(壽衣)를 걸쳤다. 이른 새벽 공기만큼 싸늘히 식은 육신은 가족들 앞에서 영원을 고하는 중이다. 수의는 이승에서 마지막 목숨이 다했을 때 입는 옷이다. ‘수’ 자는 목숨 수 자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것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도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고 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저승에서의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는 의미겠다. 이제 엄마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 줄 날개옷을 입고 영면(永眠)에 드는 중이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엄마를 쓰다듬는다. 마지막 작별의 말도 잊지 않는다. 이미 영혼은 육신을 빠져나와 먼발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다. 얼굴을 더듬는 손끝은 차가운 얼음조각을 더듬는 것 같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영영 만져 볼 수도 없다. 행여 떠나는 발목을 잡을까 목 놓아 울지도 못한다. 염습사가 엄마의 온몸을 꽁꽁 묶는다. 두 발목도 야무지게 묶는다. 영락없이 저승의 포승줄에 묶인 것이다. 손 싸개로 싼 두 손에는 평소 지녔던 염주를 감은 다음 가슴에는 꽃을 얹었다. 모든 의식이 끝나자, 가족들은 뒤도 돌아다보지 말고 나가라 한다. 정말 털끝만큼도 미련 두지 말라고. 이것이 이승과 저승의 마지막 갈림길인 것이다. 

     

  그 어떤 이별보다도 피붙이와의 영원한 이별만큼 쓰라린 아픔이 또 있을까. 그 머나먼 길을 엄마는 또 어찌 혼자 가실까. 야윈 몸에 절뚝거리는 걸음은 이제 먼 길을 떠난다. 흙에서 온 몸은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보내는 가족들만이 아직 가신 이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흐느낄 뿐이다. 추호도 뒤돌아보지 않는 매정한 것이 시간이던가. 비록 그 시간이 살아온 흔적조차 모두 지운다 한들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기억이다. 설사 이승과 저승이 또 그리 멀다 한들 자식들 가슴속에는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계시리라. 


  장례식장이 온통 꽃밭이다. 그만큼 살아생전 꽃자리를 베푼 것일 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례를 치르는 방이 오로지 우리뿐이다. 장례식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이며 복도를 근조화환이 겹겹이 에워쌌다. 엄마의 영정 사진이 꽃밭에서 환하게 웃다가, 순간 슬픈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홀로 남으신 아버지와 중년을 지나도록 아직 철이 없는 자식들이 못내 눈에 밟히는 것이다. 이승을 떠난다고 모든 기억들이 깨끗이 지워질까. 눈을 감는 순간 깡그리 잊힐 기억이라면 오히려 좋으련만, 살면서 가슴에 못 박힌 일은 왜 없었을까. 두고두고 곱씹힌 아픈 상처는 또 왜 없었을까.      


  코로나가 잠시 주춤하는 상황이라 다행히 많은 문상객들이 다녀갔다. 사태가 심각할 때에는 돌아가신 분과 마지막 손도 못 잡은 이들이 많았다. 생과 사의 벽이 너무나 허술하다. 살면서 쌓은 단단한 성벽은 하룻밤 새 와르르 무너진 모래성이 되었다. 한순간에 그리 쉽게도 무너질 수가 있을까. 이승이란 성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가족을 두고, 성문 밖을 빠져나간 영혼은 이제 삼도천을 건너는지도 모르겠다. 저승으로 가기 전에 꼭 건넌다는 망각의 강, 그 강을 건너고 나면 이승의 아픈 기억마저도 깨끗하게 잊혀야 할 텐데.   

  

  암 투병으로 힘들었던 이 년여의 시간이 이제 닫혔다. 한쪽 문이 닫힌 대신 맞은편 문은 벌써 활짝 열렸을 테다. 종교마다 죽음 이후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다르다. 그곳이 천국이든 극락이든, 결국은 영원한 안식처인 것이다. 다르다면 불교에서는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시 이승으로의 환생이 남아 있다. 또다시 돌아온다는 소리다. 소풍 나올 때마다 쌓인 업을 닦아 나가야만 윤회의 업도 마침내 다 닦인다고 했다.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 죄 많은 중생의 길인 것이다. 제발 엄마가 그 너머 열반의 세계에까지 내처 가시길.    

 

  죽음을 흔히 돌아간다고 한다.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어느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했다. 출발지가 결국에는 종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출발이 이승이 아니라 바로 저승인 하늘이란 소리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왔던 그곳이, 돌아가야 할 그곳이 환하디 환한 꽃길이면 좋겠다. 이승의 미련과 회한도 구름처럼 밟고, ‘긴 소풍 잘 다녀왔노라’며 아팠던 몸 편안히 쉬시길 또 바랄 뿐이다.     


  그 길이 얼마나 머나먼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량하게 가시는 걸음이 바람조차 걸림이 없어야 할 텐데, 바람처럼 온 길을 그저 바람처럼 돌아가시기를. 모든 장례를 마치고 화장을 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 먼 길 떠나는 이들의 줄이 애법 길다. 마지막 떠나는 길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쭉 늘어선 화구들 사이로 썰물에 떠밀리듯 서서히 엄마를 운구 중이다. 뜨거웠던 생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화구의 문이 열린다.     

“엄마 집에 불 들어가요, 빨리 나오세요!”  

   

한줄기 흰 연기가 하늘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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