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보잘것없는 서른

프롤로그

by 용전동독거총각 Mar 12. 2025

창고를 정리하다 보면 괜스레 반가운 물건들을 여럿 발견하게 된다. 그날은 본가에서 자취방으로 떠나기 전날이었고, 나는 혹시나 가져갈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다 추억의 물건을 하나, 둘 발견하자 원래 하려던 일은 미뤄두고 기억 속 잊혀진 유물 찾기에 집중했다.


가장 처음 발견한 보물은 고장난 디지몬 어드벤처 게임기였다. 그 게임기를 사달라고 백화점에서 바닥에 드러누워 엉엉 울었는데 엄마는 나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 엄하게 (비밀이지만 무력 포함이다) 나를 훈육했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든 내 모습이 짠했는지 내가 잠든 사이에 혼자 백화점으로 돌아가 게임기를 사 왔다. 엄마는 게임기를 내 머리맡에 내려놓고 한참 동안 내 머리카락을 쓰다 듬었다. 잠결에도 엄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게임기를 보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옆에는 군 복무 시절 만나던 여자친구가 보내준 수 십 장의 편지들이 검은색 비닐봉지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읽으려고 하다가 가슴이 쿵쿵대서 결국 읽지 못했다. 차라리 버리려고 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창고 깊숙이 넣었다. 물건을 버린다고 해서 마음까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홧김에 버리면 나중에 후회할 게 뻔하다. 편지를 보자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주사를 맞은 듯,  연정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이제는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어떤 추억들은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 한 켠이 아리다. 십 년이 더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읽을 수 있을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누렇게 변색되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문집 하나를 발견했다. 20년 전 학교에서 학생들이 쓴 글 중에 그럭저럭 읽을만한 글 몇 개를 모아 출간한 문집이었다. 내가 몇 반이었는지 잊어 한참을 뒤져서야 혀를 힘껏 내밀고 개구쟁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십 년 전의 나를 발견했다. 왠지 잔뜩 신나 보이는 그 아이는 한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시절 그가 나의 절친이었을 테다. 혹시나 내 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페이지를 넘겼는데 정말 내가 쓴 글도 있었다. 어린 내가 이십 년 후의 나에게 그러니까 서른 살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우연의 일치로 열 살짜리 어린이의 편지는 당사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됐다. 나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로 답을 하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외교관? 나는 지금 여행도 안 좋아하는데.

현정이는 누구니? 너 그분과 결혼 못했어.

키는 180 훨씬 안 돼. 

서른 살에 강남 아파트를 어떻게 사니. 안타깝지만 20년 후의 너는 1억도 없단다.

람보르기니 없어. 미안한데 차 아직 안 샀어. 


피식 웃으며 읽다가 갑자기 씁쓸해졌다. 나는 그 아이가 꿈꾸던 어른이 되지 못했다. 만약 이십 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한껏 기대하는 표정의 아이에게 지금의 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아이가 혹시 나를 만나게 되면 소아 우울증에 걸려 버리지 않을까. 나는 몹시 실망한 그 아이에게 어떤 변명과 위로를 건네야 할까. 사죄해야겠지. 억울해도 진심으로 사죄해야겠지.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았음을.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도망치며 살았왔음을. 상처받기가 두려워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했음을. 그렇게 스스로 망가지도록 방관했음을 진심으로 사과해야겠지.  


나는 외교관이 되지 못했다. 결혼은커녕 애인도 없다. 집도 차도 없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진단받아 일 년 넘게 약을 먹고 있다. 나는 고작 이런 인간이 되었다. 이십 년 전 어린 나에게 내가 나라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가 원한 삶은 이런 삶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원한 삶도 이런 삶이 아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엉망진창으로 얽힌 실타래처럼 푸는 법을 도통 모르겠다. 실타래야 잘라 버리고 다른 실을 엮으면 그만이지만 인생은 오직 한번뿐이다.


그날 밤 불을 끄고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다 번뜩 일어나 펜을 들었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일 중에서 유일하게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 그건 오로지 글을 쓰는 일뿐이다. 글을 쓰기로 했다. 서른의 초입에서 여전히 방황하는 내 마음을 솔직히 적기로 결심했다.  


이십 년 전의 고민들이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지금 내 존재를 뒤흔드는 걱정들도 미래에는 그저 젊은 날의 방황 정도로 기억될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변하는 마음마저 못내 아쉬워 지금의 내 영혼을 뒤흔드는 바람의 결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다만 나의 방황의 결이 당신의 방황의 결과 맞아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저 당신만의 것은 아님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세상 어딘가 당신만큼 혹은 당신보다 더 고통받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이기적이지만 가끔은 타인의 고통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지 않은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