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떠난 자리를 채운 것들

by 빛나는 지금

쌉싸름하고 고소하고 시고 때로는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커피. 커피는 그것 자체로도 무궁무진한 맛과 향을 자아내지만 우유, 크림등과 어울려 또 수만 가지의 색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커피 자체만이 아니라 커피를 내려서 그 커피를 받아 손에 들고 천천히 마시는 시간 모두가 바쁜 일상에 짬이 되고 밋밋한 일과에 신선함을 더해주는 즐거움이 되어준다.

아무리 피곤해도 진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면 어떻게든 내 앞에 놓인 이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샘솟곤 했다.


이 멋지고 매력적인 커피 친구와 서서히 거리 두기를 하게 된 것은 불편함 때문이었다.


카페인에 민감하다.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고 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긴장이 되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증상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꿋꿋이 계속 커피를 마셨더니 조금씩 몸도 적응이 되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손떨림 현상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한 증세는 그대로였다. 특히 심신이 피곤하여 커피로 달래어볼 생각으로 마신 후에는 피곤감은 다소 덜어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물론 나만 느끼는 경미한 수준이긴 했지만 불편함은 분명했다. 그리고 잠. 나는 잠을 사랑한다. 우울한 일이 있을 때 누군가는 달달한 무언가를 찾는다고 하는데 나는 단연코 잠이다. 일단 자고 나면 많은 일이 괜찮아졌다. 그런 소중하고 중요한 잠이 커피를 마시고 나면 방해를 받았다. 특히 진한 커피를 평소보다 많은 양을 마시고 나면 아무리 마신 후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잠자리에 들어도 뒤척이기 되었다. 물론 잠이 들긴 든다. 그러나 잠이 들기까지의 길이 험난했다. 뒤척이고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잠이 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피곤했다.


그리하여 커피와 서서히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


먼저 디카페인을 시도했다. 인스턴트커피를 시작으로 편의점 커피 드립백 커피, 일반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디카페인 커피등 카페인 함량은 줄이면서 커피맛은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열심히 찾았다. 편의점 커피등 이미 제조되어 나온 커피는 다소 밍밍했지만 그 외 디카페인 커피는 놀라울 정도로 일반 커피맛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내 입맛이 무딘 면이 있지만 여하튼 충분히 디카페인임을 의식하지 않고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단점은 가격과 디카페인 공법. 일단 디카페인은 다소 비쌌다. 같은 용량대비 모든 디카페인은 다 비쌌다. 다만 요새는 커피전문점에서 추가 비용 없이 디카페인으로 바꿀 수 있는 경우들이 늘고 있어 좋다. 두 번째는 디카페인 공법. 이 부분은 더 알아봐야 하긴 하는데 전에는 화학품을 사용해서 카페인 성분을 제거했다고 한다. 요새는 워터공법으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하는데 모든 디카페인 과정이 인체에 무해한 공법으로 제조되었는지 매번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냥 괜찮겠거니 하고 마시기는 했지만 아는 게 병이라고 유해할 수 도 있다고 하니 신경이 쓰이긴 했다.


다음으로 차를 마셔보았다. 당귀차, 대추차, 각종 과일차 등등 카페인이 없는 차종류로 도전해 보았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힘들었던 점 중의 하나는 일하면서 종종 마실 거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근무하다 보면 꼭 마시고 싶지 않아도 마신다는 행위로 나 자신을 일깨우거나 위로해 줄 타이밍이 종종 찾아온다. 커피는 하루종일 곁에 놔두어도 크게 맛이 변하지 않고 늘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홀짝이는 순간마다 잠깐의 쉼과 여유가 되어주었다. 그 커피 친구를 대신하기에는 차는 너무 밋밋했다. 차의 세계로 더 깊게 들어가면 단연코 그 넓고 다채로운 경험들이 또 커피와는 다른 매력이 있겠지만 일단 커피대용품을 급하게 찾고 있던 나에게 맛도 향도 은은하다 못해 밍밍했던 차는 커피에 대한 욕구만 더 강하게 불러일으켰으니 일단 뒤로 보류하기로 했다.


그다음으로는 달달한 각종 음료들이었다. 식탁 미니멀리즘을 시작하면서 유제품종류도 끊었기에 우유를 제외하고 음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마실거리들이 별로 없었다. 그 좋아하던 초콜릿 우유도 아웃, 딸기우유도, 바나나 우유도 아웃. 맛있고 달달했던 음료 대부분이 우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찾게 된 것이 아몬드 우유, 두유 등이었다. 지금도 간혹 마시긴 하지만 이 친구들의 약점은 양이 적고 또 식사느낌으로 마시게 되어 커피와 같은 여유와 즐거움 그리고 고즈넉한 매력은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물을 마신다. 그냥 출근하면 예전에 커피를 채웠던 예의 같은 텀블러에 온수와 정수를 적절히 섞어서 따뜻한 물 한잔을 준비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맛은 그냥 물맛이다. 다만 자극적인 맛이 전혀 없다 보니 하루 종일 마셔도 지겹지는 않다.

그리고 커피 마실 때처럼 종종 마시기보다는 내 몸이 물을 찾을 때 마시면 되니 좀 더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커피와 조금씩 멀어지고 난 후 나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잠이다. 이제 머리를 베개에 누이면 자연스럽게 몸이 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잠으로 젖어드는 기분은 참 좋다.


그리고 커피를 마신 후 찾아왔던 경미한 불안감과 우울감도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매여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유가 주는 자신감이 덤으로 따라온다.


커피 아니면 안 돼. 커피는 꼭 마셔야겠어.라는 것도 일종의 묶임이었다.

커피대용품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커피맛 나는 보리 음료에 귀리라테를 만들어볼까 하고 종일 상품평을 찾아다니다가 알아차렸다. 내가 아직 커피에 매여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커피대용품을 모색 중에 있으니 아직 나와 커피와의 인연은 커피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는 불균형 관계이다,


이제 좀 더 거리를 두고 점차 커피를 필수가 아닌 기호식품을 대할 수 있을 때

우리의 관계가 좀 더 평등해지고 내가 소비자로서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커피와 편안하게 조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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