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천천히 헤어지기

by 빛나는 지금

아주 어릴적 엄마는 손님이 찾아오시면 좁은 나무 마루에 작은 접이식 상을 펼치고 커피를 내오셨다. 그때는 커피를 타는 과정부터가 하나의 손님맞이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부터가 흥미진진했다.


지금은 물건도 가구도 넘치는 시대를 사는지라 오히려 반작용처럼 미니멀리즘의 힘이 더욱 부각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 엄마가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을때는 물건을 재어두는게 미덕이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전혀 쓰지 않는 찻잔과 찻받침이 손님과 함께 등장한다. 그 뽀얗고 부드러운 찻잔 세트의 낯빛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부실 지경인데 그 뒤를 이어 줄줄이 따라나오는 커피세트는 또 신세계였다. 작은 바구니안에 인스턴트 커피 유리병과 커피 프리마(가루 크리머) 와 흰 백설탕 통이 곱게 담겨 나오면 엄마는 으례히 커피 두스푼, 프리마 두스푼 설탕은 세스푼을 넣으셨다. 가끔 양이 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 일종의 공식처럼 2:2:3 의 순서가 지켜졌다. 이후 나도 이 순서와 분량을 지켰을때가 가장 옛날 달달한 커피의 향수를 그나마 잘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이 주전자에 커피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엄마는 천천히 커피잔에 물을 부었고 작은 티스푼으로 두어번 저어주면 진한 갈색의 커피가 완성되었다. 하얀 커피잔에 담긴 뜨거운 커피. 고소하면서도 설탕의 달달함이 섞인 믹스 커피의 향내는 어린 나에게 아주 가까이 있지만 아직은 다가갈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같았다. 엄마 옆에 붙어서 커피 냄새를 커피 마시듯 들이마시고 있으면 엄마는 "아이들은 커피 마시는거 아니다" 하시면서도 티스푼으로 커피를 떠서 맛보게 해주셨는데 달고 씁쓸하고 시고 고소한 맛이 한데 어우러진 커피맛은 한마디로 오묘했다. 늘 먹는 과자처럼 마냥 달지도 짭쪼롬하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달기에 계속 맛보고 싶은 유혹이 컸고 아직은 마시면 안된다기에 더욱 궁금했던 커피. 그렇게 어린시절 내가 아는 커피는 엄마가 직접 타시는 믹스커피였다.


그리고 중3을 맞이하며 처음으로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이란 것을 하게되었다.

무슨 공부할게 그리 많다고 하루종일 학교에 있었는데 다 식은 도시락 밥까지 먹고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 교실에 남아있어야 한단다.

그때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통과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은 친구와의 수다와 자판기에 500원 주고 뽑아 마신 캔커피였다. 100원 언저리였던 종이컵 커피에 비하면 캔커피는 꽤 거금이었지만 한번 뽑아서 손에 쥐면 2~3시간 친구와 수다떠는 동안 중간 중간 홀짝 홀짝 마시며 더욱 대화를 재미나게 돋우워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주었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종이컵 커피에 비해 양도 많아서 아껴 먹으며 수다도 나누고 재미없는 공부도 이어갔다.


20대에 접어드니 이제 원두커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때부터는 커피와 조금 소원해졌다. 이미 캔커피등으로 단맛에 익숙해져서 원두커피가 유독 쓰게 느꺼진 것도 있겠지만 커피보다는 달달한 음료나 차를 마셨다. 간혹 커피를 마시게 되면 역시나 바닐라, 카라멜 마끼아또 등 커피자체의 맛보다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부재료의 맛을 더 선호했다.


쓰기도 하고 시기도 한 커피의 맛을 찾게 된건 육아와 복직이 이어지면서부터이다. 출근하여 직장의 커피머신으로 내린 원두커피는 즉각적으로 아침부터 벌써 지친 나의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부어주었다. 일을 하는 중에도 입이 심심할때면 늘 큰 텀블러컵에 받아둔 커피를 홀짝이며 일의 고단함을 이겨냈다. 직장동료들과 한자리에 모일때면 커피는 늘 테이블의 한 중앙에서 대화에 묵묵히 참여했다. 그냥 맨손으로 말을 하는게 어색했다. 커피컵을 들고 말을 하거나 상대의 말을 들어야 모든 상황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주말이 되어 혼자 집에서 아이들을 볼때 늘 위로가 되었던 생각은 밥먹고 나서 달달한 커피 혹은 씁쓸한 커피를 한잔 타마시면 이 피곤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은은하고 오묘한 향이 더해질꺼라는 기대였다.


역시 달달하거나 씁쓸했던 커피 한잔은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만 보이는 다른 공간을 여는 열쇠같았다,


그렇게 커피를 즐겼고 그러다보니 커피 없이 보낸 하루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은 듯 어색해졌고 매일 아침이면 큰 컵 가득 커피를 채우고 책상 한켠에 두고 "커피 친구, 오늘을 부탁해." 하며 하루를 버텼는데 그런 나에게 미니멀라이프는 문득 물어왔다.


"커피는 미니멀 안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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