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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Aug 10. 2023

나는 무조건적인 영유파였다

영유 : 영어유치원의 줄임말

나는 기필코 영유를 보낼 거다. 5살이 되면 바로 보내야지.

우리 애는 생일이 늦으니 얼마나 이득인가.

1월생 아이들보다 거의 1년을 영어에 더 빨리 노출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좋아했다.


친구던 지인이던 육아 선배들을 만날 때면 나는 늘 같은 질문을 했었다.

"혹시 애기 영어유치원 보냈어?"

각양각색의 답변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는 안 보냈지만 둘째는 보냈다는 친구

모국어가 최우선이라는 말에 영어는 한 글자도 가르치지 않았더니 초등학교 들어가서 영어학원 보내려고 과외했다는 지인

아이를 영어유치원을 보내서 상당한 아웃풋에 만족하는 학군지에 사는 친구

지금은 초등학생인 아이가 지나가는 말로 나는 나중에 아이 낳으면 영어유치원은 꼭 보낸다고 했다는 남편 직장 선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유치원을 보내면 아이가 저절로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주변 친구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더 확신이 들었다.

'영유를 꼭 보내야겠구나'

말 그대로 영유를 맹신하고 있었다.


내가 이리도 영어유치원에 목을 맨 것은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기 때문이다.

나는 특목고, 그것도 외고 출신이지만 영어 기피자이다.

잘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영어 공부를 안 하고 안 하다 보니 못하는 악순환의 굴레에 서있던 사람이다.

토익 최고 성적이 900점을 넘어본 적 없고,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시작된 스트레스가 대학시절과 취업 이후까지 내내 이어졌었다.


지금은 아줌마가 다 돼서 손짓, 발짓,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남발할 수 있지만 사춘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모님이 그 비싼 돈을 주고 시켜준 영어과외에서 영어 한마디 하는 게 그리도 창피해서 숨고 싶었던 인간이었다. 성격적인 면도 한몫했던 것 같고, 그저 읽고 쓰고 외우는 방식이 좋은 공부법이라고 믿었던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도 '언어로써의 영어'를 체득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아이에게만큼은 나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와의 악연은 나로 끝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영어유치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우선 나는 영어유치원이 정식 유치원이 아니라 학원인지도 몰랐다. 그 안에서도 학습식, 놀이식, 절충식으로 구분하는지도 몰랐다. 엄마들이 학습식 영유를 더 선호한다는 것도 놀라운 점이었다. 놀이식을 보낼 거면 보내지 않는 것이 낫다는 엄마도 있었다.

하긴, 한 달에 못해도 150만 원 이상을 원비로 내는데 아이가 알파벳 몇 자 정도 읽는 걸로 만족할 순 없을 수 있다. 그래도 학습이라는 말에 왜인지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입학설명회 시즌인 11월이 되어 하나, 둘, 집 근처의 영어유치원을 알아보면서 나의 무지함에 다시 한번 놀랐고, 내 마음속에는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어린이집 좋지. 직장어린이집에 다니는 게 익숙해져 버려서 만 5세까지 보내는 경우도 있다더라~


그 무렵 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직장어린이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마도 내가 직장어린이집을 보내고 있다 보니 이야기 끝에 지인이 했던 말 같다. 사실 영어유치원을 꼭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던 2022년 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현재 다니는 어린이집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를 다니면서 직접 해당 영어유치원에 방문해 보니 아이가 다니는 직장어린이집의 장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우선 시설 같은 하드웨어적인 차이는 비교할 수 없도록 차이가 났다.

대부분의 영어유치원이 상가 건물의 1개 층 정도를 사용하고 별도의 놀이터도 없는 반면 현재 다니는 어린이집은 몇 년 전 새로 지은 단독 건물에 건물 안에 놀이터와 텃밭, 산책로까지 구비된 곳이었다. 육안으로만 보아도 개별 교실의 크기 차이가 2~3배 이상 났고 체육수업 등을 주로 하는 유희실의 크기도 상당히 차이가 났다.


보육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영어유치원에 일찍 보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했던 느린 생일도 복병이었다. 아이가 생일이 늦기도 했지만 말도 느렸고 배변훈련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대변을 못 가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니 보육에 중점을 두는 어린이집은 아이를 좀 더 세심하게 보살펴 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영어유치원은 말 그대로 얄짤 없어 보였다. 게다가 후보군이었던 영어유치원은 간식시간조차 없이, 정 먹고 싶으면 팩우유 정도 하나가 끝이라는 말에 나의 마음은 상당히 돌아서게 되었다.


결정적으로는 아이가 2022년 가을 무렵부터 어린이집 다니는 걸 참으로 좋아하기 시작했다.

봄까지만 해도 가기 싫다며 아침마다 도망가는 녀석과 씨름하기 바빴고, 때론 교실 앞에서 울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가 선생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하니 등하원도 한결 수월해지고 점차 안정을 찾았다.


 '굳이 5살에 영어유치원을 가야 할까? 6살에 보낼까'

꾀가 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6살에 영어유치원을 보내거나, 아니면 5살 가을에 중간 입학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간간히 영어로 발화가 있었지만 엄마표 영어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영어유치원을 좀 더 늦게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엄마표 영어'를 계속할 생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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