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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Aug 12. 2023

영어도 놀이일 뿐이다

과욕은 금물

엄마표 영어의 가장 큰 걸림돌은 누구일까? 아이일까?

아니, 바로 엄마. 내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무슨 이런 엉뚱한 소리야?

나를 돌아보니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애는 말이 느린 아이라 영어 발화에 대한 기대는 말 그대로 '1'도 없었는데, 기대가 없다 보니 실망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영어를 한 두 마디 하기 시작하고, 점점 사용하는 문장 수가 늘어가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혼란스러움도 가중되며, 갈팡질팡 한다.


'지금 좀 더 푸시하면 애가 영어를 좀 더 잘하지 않을까? 영어캠프를 보내보면 어떨까? 학원을 보내볼까?'

이런 마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치고 올라온다. 이렇게 마음이 요동칠 때는 손가락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인터넷에 들어가 종일 검색, 또 검색.

엄마표 영어, 영어유치원 6세 반, 만 3세 영어...


그렇다, 문제는 나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영어유치원 6세 반에 입학시켜도 보고, 영어 캠프도 보내보고, 영어학원도 보내보고, 방문수업도 받아보고 뭐 아주 요란하기 그지없다. 상상의 나래가 한껏 펼쳐진다.


그런데 아이는 참으로 한결같다. 그저 아이에게는 영어도 놀이일 뿐이다.



엄마 A 그려봐. 크게~


지금으로부터 약 2주 전, 아이가 낮잠을 자고 나와 책상 위에 있는 공책을 보더니 대뜸 내게 한 말이다.

알파벳이 쓰고 싶었나 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3월부터 영어 알파벳 송을 배우더니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시작하고 이제는 대부분의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글씨를 쓰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써봐"가 아니고 "그려봐"라고 말한다.

아이가 직접 그린 알파벳 A

나는 공책을 펴고 알파벳 A를 열 개쯤 써준 후, 너도 그려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긴 못 그리겠단다. 그래서 따라 그려보라 하니 따라 그리는 건 할만하다 싶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내가 써놓은 글자 위에 따라 쓰는 시늉을 한다.

아이는 한참을 그렇게 알파벳 그리기를 하고 나서는 블록놀이를 한다며 레고를 찾았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가 섣부르게 욕심을 냈다가 아이가 저 멀리 도망가버리면 어쩌지.

아이는 매일매일 성장한다. 아이의 한국말도, 영어도 그렇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늘어나며 인지 능력이나 신체 능력도 매일매일 꾸준히 향상된다. 때로는 부스터를 달아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교육 같은 것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알파벳 A를 그리며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니 더욱 그렇다.


아이는 영어동영상을 보며 동영상 속 캐릭터들을 따라 하면서 놀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올해 4~5월 한참 푹 빠져서 보던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Gabby's dollhouse'를 보고서는 googly eyes로 만들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아이가 계획하고 엄마를 초대한다. 나는 그저 그 초대에 응하면 될 뿐이다.

아이가 구글리아이즈에 빠져 만들었던 작품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 더욱 좋아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five little monkeys'란 노래는 침대에서 다섯 마리의 원숭이가 한 마리씩 떨어져 머리를 다치는 내용인데, 그 게 그리도 웃긴가 보다. 집안의 온갖 인형들을 가져와서는 침대 위에서 한 마리씩 점프를 시키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물론 나한테도 시킨다. 내가 웃긴 사람이 아닌데 대충 떠오르는 가사로 얼버무리듯 불러줘도 아이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놀이터에 나가서 뛰어놀 때 "ready, steady, go"를 외치면 흥이 한 껏 더 달아오른다.

미끄럼틀을 탈 때도 "wee~"라고 외치거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막이 나오면 "wee~ 나는 슬라이드 탄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웅덩이에서는 참방참방 발을 구르며 "muddy puddle"을 외친다.


돌이켜보니 아이는 철저히도 영어와 함께 놀고 있다.

이런 아이에게 영어의 즐거움을 뺏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언젠가 싫어도 책상 앞에 앉아 학습을 해야 하는 시기는 분명히 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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