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San Diego)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해봐야 하는 한국 날씨를 생각해보면 여기는 그야말로 청정지역이다.
“날씨 참 좋네!”
[08:10 am]
언제 왔는지 옆에 구름이가 앉아 밖을 보고 있다.
“우리 나가볼까?”
맑은 공기를 따라 무작정 나왔다.
터벅터벅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도그비치’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구름이도 나도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묵묵하게 바다를 보는 구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구름아! 너도 바다 보니까 기분이가 좋지?”
읭...??
구름이 눈깔이가 심상치 않다.
얘는 바다를 보는게 아니다. 백사장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있었다. 입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며..
“저기에 들어가면 넌 신나겠지만, 과연 아빠도 신날까?”
못들은 척 앞만 보는 구름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귀를 살포시 들어올리고 속삭였다.
“아빠는 힘들어. 너 저기 들어가면 뒹굴꺼자나. 안그래도 아빠는 할 일이 많은데 너까지 저기 들어가면,, 어후!! 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
나는 손사래를 쳤다.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친구들을 바라보며 레이저를 발사중인 구름이..
“저기 엄청 큰 애들 보이지? 너 저기가면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큰일나.. 생각해보니까 무섭지? 그치?”
쫑알대는 내가 귀찮았던지, 쳐다보며 한마디 날린다.
“놉!!”
(아오!!!!)
“너 NO가 한국말로 머야? 한국말로 해봐!! 니가 NO를 한국말로 하는 순간, 아빠는 떼부자가 될꺼니까.. 말해봐. ‘아니’ 라고.. 아니아니 존댓말로 ‘아니요’ 라고!!”
[ 역사상 최초! 말하는 강아지! ]
기네스북에 오르고, 각종 언론사 인터뷰에 표지 장식까지.. SNS 클릭수 탑을 찍어가며 세상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고, 전용기를 타고 전세계를 날아다니며 광고를 싹쓸이 중인 구름이..
혼자 벼락부자가 되는 개망상을 펼치다 구름이 뒷통수를 보고는 현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로또를 사지... ”
쪼그려 앉아있다 일어나니 핑 하며 도는데, 뒤에 있는 펜스를 얼른 붙잡았다.
“아... 죽으면 늙어야지...”
말도 헛나온다. 눈을 감고 호흡을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다. 응?? 내가 뭘 잘못 본걸까? 차에서 왠 거지같은 사람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데, 뿌옇던 시야에 초점이 맞춰지며 윤곽이 드러났다.
그 사람은 차 창문에 비친 나였다.
(이런 거지같은 꼬라지로....... )
미치지 않고서야 밖으로 기어나올 수 없는 그런 상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얼마나 많은 굿모닝을 날렸던가..
(하아...... )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고, 구름이를 들쳐 안았다.
“구름아! 가자!! 니가 지금 여기 있을 때가 아니야.. 아니, 아빠가 여기 있을 때가 아냐.. ”
빠른 복귀만이 살 길이다.
5분 거리의 도그비치가 50분은 걸리는 것 같았고, 돌아가는 길에 더이상의 굿모닝은 없었다..
(싸가지 없는 아시아인 아님.. 쪽팔린거임... )
집 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고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방에서 나오는 나탈리..
“오빠, 그러고 나갔다 온거야?”
“.................”
[11:10 am]
(오빠, 그러고 나갔다 온거야? 라니..... )
부엌에서 사부작사부작 음식을 만드는 나탈리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망상 중이다.
‘그러고 나갔다 온거야?’ 라는 말에 꽂혀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갉아먹는 다 큰 어른아이.. 이놈의 벤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은 ‘그러고 나갔다 온거야?’ 를 움켜쥐고 놔줄 생각을 안했다.
가끔 이렇게 먼가에 꽂혀 정신상태가 이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건, 내가 그것에 꽂혀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망상의 존재가 되어 나탈리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때, 내 앞으로 다가오는 구름이..
댕댕이들은 냄새로 사람의 감정을 안다고 한다. 무슨 냄새가 났길래 친히 발걸음하여 날 쳐다보는 것일까?
아마 분노의 벤댕이 냄새를 맡았겠지. 엄마를 지키기 위해 소갈딱지를 캄다운 시키러 왔나보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더니... )
“나탈리, 딸 하나 참 잘 키웠어!”
“읭?? 갑자기?”
준비한 음식과 콜드브루 두 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혼자 키웠나? 오빠랑 같이 키웠지!”
(두둥!!!!!)
(오빠랑 같이 키웠지...!)
개감동..
오빠랑 같이 키웠다니..
맞긴 맞는 말이지만..
말로 직접 들으니 갬동이다...
(역시 고마운 일이든 미안한 일이든 속으로 담지 말고, 말로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스르르륵 사라져버린 망상씨..
망상씨가 떠나자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것처럼 시야가 선명해지며 군침도는 비주얼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이걸 어떻게 만들었대?”
“인터넷 보고 만들었지. 시간이 있었으면 더 잘했을텐데.. ”
“대단하다! 나탈리!”
“난 한게 없는데..”
“한게 없다니..?”
“내가 한게 머있나!? 재료가 다했지!”
“무슨 소리야. 나탈리가 다 했지! 이거 만들려고 재료 검색해서 확인하고 장봤지, 씻고 닦고 자르고 조리해서 예쁘게 데코까지 했는데, 한게 없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했구만!”
“그냥 아무나 다 하는거야..”
나탈리는 칭찬을 버거워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의 인정과 고마움을 잘 받는것도 중요한데, 나탈리는 스스로에게 많이 인색하다.
“나탈리는 어쩜 그러케 예쁘냐.. ”
“아니야.. ”
‘아니야’ 가 입에 붙어있는 나탈리.. 잘해도 인정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스스로에게 엄격한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린시절, 인정에 대한 욕구를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해소되어지지 않고, 갈구하는 상태로 남겨지게 되면, 그것이 결핍이 되어 받는 방법도, 주는 방법도 잘 모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엄격해지고 인색해지게 되는 이유다.
“칭찬은 잘 받고,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표현해보는건 어떨까?”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
루꼴라와 잠봉햄이 속을 꽉 채우고, 치즈와 토마토가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 바게트는 보기에도 군침이 돌았다.
“나탈리! 이건 진짜 돈받고 팔아도 되겠다!”
“고마워.. ”
“그르치!!”
때때로 날씨나 분위기, 맛, 냄새 등이 어느 특정 시기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
빵을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맛과 향이 입 안 가득 퍼지며, 프랑스 니스(Nice)에서 먹었던 레스토랑으로 순간 이동을 시켜주었다.
“우와아아아아 너어~ 무 맛있다!!”
“맛있게 먹어죠서 고맙슴니다!”
“샌디에고에서 니스를 경험하게 해주다니, 쥬땜므 나탈리!!”
(‘그러고 나갔다 온거야’ 가 머에요??)
[12:30 pm]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보는데, 나에게 이곳은 아직도 니스(Nice) 다.
구름이는 나갈 준비를 마쳤고, 나탈리만 기다리면 되는데, 방에서 들리는 목소리..
“오빠, 다 했어?”
“응! 다 했어!”
우리가 외출할 때 걸리는 시간은 보통 나탈리 50분, 구름이 15분, 내가 5분 정도 된다. 나는 잠옷바람으로 앉아있다가도 후다닥 1분만에 옷만 입으면 바로 외출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탈리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도 잠옷만 입고 앉아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오빠! 안나가?”
“응.. 나가..”
(난 여전히 소파다..)
“빨리 옷 입어. 나 다했어!”
“응.. 아라써... ”
난 안다..
아직 멀었다는 것을..
와따리가따리 분주한 나탈리..
“오빠! 준비 안해? 안나갈꺼야?”
“응응.. 나가나가.. ”
여기가 샌디에고라고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다.
“오빠! 안나가?”
“응응.. 나가나가.. ”
그러고도 한참을 흐른 뒤에 모습을 드러낸 나탈리.. 말끔하니 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며 아무 말이 없다.
“오늘은 나탈리가 운전해보는게 어때?”
“응? 무서워..”
“머가 무서워? 한국에서도 하는데! 국제면허증도 받아왔겠다! 이럴 때 캘리포니아에서 운전해보지, 또 언제 해보겠어?”
(운전하기 개실음... 젭알......)
"그래! 알았어!"
(오예~~~~~~~~~~~)
나는 10여년 전, 나탈리에게 운전을 가르쳤다. 나탈리의 따끈따끈한 장농면허를 주행이 가능한 면허로 탈바꿈 시켜준 장본인이 바로 나다.
'어! 어!! 브레이크브레이크!!'
'어!!! 핸들 꺾어야지!!!!'
'지금이야!! 들어가들어가!!'
도로주행 연습 중인 우리 차안엔 이딴 대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풀커버 보험을 들었고, 조수석 옆 창 밖을 보거나, 썬그리를 쓴채 눈을 감고 앞을 본 일이 없다. 볼 용기도 없었고, 보고싶지도 않았다..
"나탈리! 다 갠차나.. 처음엔 다 그런거야.. 박을꺼면 차라리 벽을 박아.. 알았지?"
나탈리의 운동신경은 탁월했다. 운전을 금방 익혔고, 빠르게 잘 달렸다. 운전을 하는 나탈리 차를 탈 때마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어쨋든 저쨋든 종종 서울 구경을 잘하고 돌아다녔었드랬다.
(주차가 아직 미숙한건 안비밀..)
이 넓은 땅덩이에서 머가 문제랴..
나는 조수석 창문을 통해 샌디에고를 구경중이다. 정면은 구경할 게 없다. 이틀내내 구름이는 뒷좌석 카시트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구름이 너도 나랑 같은 느낌...?? )
[02:40 pm]
씨포트빌리지(Seaport Village)
나에게 발렛을 맡기는 나탈리씨..
(발렛비는요..??)
이곳은 평화로운 해안가에 기념품샵, 카페, 레스토랑 등이 이어져 있는 야외 쇼핑몰이다. 쇼핑몰 구경은 돌아오는 길에 하기로 하고,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박물관으로 만들어논 거대한 항공모함을 지나쳐 나타난 그 유명한 키스동상..
"뽀뽀하는 저 두사람 실제론 모르는 사이였대!"
"응! 나도 알아!"
"전쟁이 끝나고 얼마나 기뻤으면 그랬을까?! 우리도 뽀뽀타임?"
"구름아! 일루와!!"
(나 누구랑 얘기하니..??)
해안가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 쉬었다 갈겸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치즈케잌 한조각과 커피 그리고 바다. 이곳은 샌디에고. 달달한 치즈케잌 한 입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한국말.. 그 목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옆 테이블에 앉는 한국인 여성 두 분.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분의 대화를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나는 귀가 두 개나 달려있다.
“다영이 걔, 뭔 얘기만 하면 지가 다 맞대.”
“걔 엣티제야. 맞다고 논리대는거.. 너랑 안맞지!”
“아.... 요즘 걔랑 말 섞기 싫어.”
“그냥 만나지마! 내가 얘기했지? 나 썸타는 애! 나도 걔 안만날까 생각중이야!”
“넌 또 왜?”
“걔 엣프피거든.. 맨날 친구들 부르는데, 개짜증남!”
요즘은 어딜가도 심심찮게 들리는 mbti 얘기..
mbti 테스트는 기분이나 환경,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기분이 출렁대는 나 같은 경우, 테스트를 할 때마다 다르게 나온다.
사람은 고정화 되있지 않다. 내가 정하는 순간, 그게 내가 된다. 옛날엔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했던 시절도 있었다. 혈액형과 mbti 로, 상대를 판단하고 나를 틀에 가두는 일은 아주 무서운 일이다.
“나탈리는 mbti 어떻게 생각해?”
“완전히 아니다라고 할 순 없지만, 다 맞다고 할 수도 없지! 오빤 mbti 머지?“
“나? 몰라! 할 때마다 달라!”
“싸이코패쓴가??ㅋㅋㅋㅋㅋㅋ“
“............“
나는 치즈케잌을 난도질해 먹었다..
(싸이코패쓰니까..... )
나탈리는 도시여자답게 가는 곳곳을 앞장서서 리드했고, 구름이와 나는 나탈리 덕분에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04:50 pm]
케이트세션즈 파크..
나탈리가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노는 구름이와 나탈리 사이로 웨딩 사진을 찍고 있는 한 커플이 보였다. 나탈리와 커플이 교차로 보여지며, 우리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신랑 Mr.Kim은 신부 나탈리를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결혼을 했으니 말이지만, 긴 연애는 여자 입장에서 분명 불안한 일일테다..
(나탈리도 그랬겠지. 나 같은 놈을 멀 믿고.. )
그 길고 긴 연애, 그 기다림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뭐든 잘해야 된다고 마음 먹지만,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계속 노력해야 한다.
저 앞에 웃고있는 나탈리는, 꼭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아닌 내가 있으니 잘해야 하는 것이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던 나탈리가 생각났다.
“오빠! 여기도 봐야지!!”
신랑신부 행진할 때, 신부측도 좀 보라고 나탈리가 환하게 웃으며 복화술로 한 얘기다.
“오빠!! 여기봐!! 얘봐밬ㅋㅋㅋㅋㅋㅋㅋ”
대짜로 뻗어 온몸을 잔디에 부비부비하는 구름이.. 댕댕이들은 땅에서 지렁이 냄새가 나면 몸을 비빈다던데 지렁이가 있다는 건 토양이 좋다는 얘기겠지.
(그래서 사람들이 잔디밭에 벌러덩벌러덩 누워 있는거구만!? 좋은 토양에 나도 좀 눕고 싶다.. )
“오빠! 사진 좀 찍어죠!”
“어! 그래그래!!”
(이런 좋은 토양에 나 따위가 눈치없이 누울 생각을 했다니... )
구름이를 쳐다보며 꺄르르꺄르르 행복해하는 도시여자 나탈리..
(캠핑카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
“사진 찍어달라고!!”
“응응! 구름아!! 여기봐 여기!! 여기!!”
(아놔.. 쫌!! 여기 좀 봐라.. )
오늘부터 나는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망상에 빠지지 않기로 했다. 유쾌하게 지나가도 될 일들이 심각해지면 시간과 에너지만 축낼 뿐이니까..
(응응 그래그래! 너네 둘이 행복하면 됐지. 그럼 나도 행복한 거야! 우리 사진 많이많이 찍어 가자!!)
(근데, 난 누가 찍어주니...???)
< 집으로 가는 길 >
동네 와인 가게에 들렀다.
“오빠! 순대국밥집 왔으면 순대국밥 먹어야지. 왠 만두국?”
“머선 소리지?”
“캘리포니아에 와서 왜 보르도 와인을 보냐고.. ”
“오오~~~~~~~ 나! 탈! 리!!!”
“쥬땜므 나탈리!!”